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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과 지역사랑의 모범을 보여준 ‘김해 김씨 삼현파 영종문중’
                    김홍복전 인천중구청장 / 본지 자문위원장   길고 길었던 장마와 연이은 태풍이 지나가고 어느덧 절기상 ‘추분’이 되었습니다. 24절기 중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16번째 절기를 맞은 것입니다. 새삼 시간이 참 빠르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추분에 즈음하여 논밭의 곡식을 거둬들여야 한다는 것을 조선시대 선조에게 배웠듯이 무엇이든지 때가 있고 그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누구의 후손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온고지신(溫故知新)’입니다. 역사는 때가 지나면 알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며칠 전 김해 김씨 삼현파 영종문중을 방문해 김명준 종친회장님과 김명식 총무님으로부터 선친들이 걸어온 길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 문중은 조상 김일손의 후손인 김성원 선조께서 1464년 영종도에 입향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김성원 선조는 문과·무과에 급제한 분이셨지만 당시 정세가 불안하던 시대여서 전라도에서 충청도로, 다시 충청도에서 배를 타고 영종으로 들어오셔서 신불도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선조분은 세 아들을 낳으셨는데 현재 신불도의 김홍석씨네가 작은집인 셈이고, 삼목도 김진영 공항교회 장로님네가 큰집, 넙디 김흥선씨네 집(중구 문화재 지정)이 김해 김씨 영종문중의 시초입니다.   이후 김해 김씨 영종문중은 지역의 뜻있는 일을 주도하고 동참하면서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일제시대 때는 독립자금을 대고 보통학교 설립을 주도하는 등 애국 활동을 많이 한 문중입니다. 먼저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써달라며 쌀 3,000석을 내놓았는데 당시는 정미해서 100Kg가 1석 가마니로 유통하던 시절로 현시세로 아주 큰 금액이었습니다. 넙디 김종현 어른의 집이 경제적으로 풍족했기에 선친께서 선뜻 독립자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기에 보통의 애국심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선조들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후손들도 이어받아 늘 가슴에 새기고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일제시대 당시 영종도에 학교가 없어 교육환경이 매우 열악한 시절이었습니다. 이 또한 당시 면장을 역임하신 김달현 어른이 중심이 되어 1920년 9월 22일 전소에 영종공립보통학교를 건립하였습니다. 이 학교가 바로 현재의 영종초등학교와 영종중학교입니다. 영종초등학교는 올해 100주년을 맞이합니다. 영종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를 건립한 문중의 후손으로서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더불어 영종도의 섬과 섬을 연결하는 돌다리 건설사업도 이 문중에서 시작하였습니다. 맨 먼저 삼목도를 연결하고, 두 번째로 영종도와 신불도를 연결했고, 세 번째가 영종도에서 용유도를 연결한 것이라고 합니다. 주민들은 이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공적비를 세웠는데 현재는 문중 사당으로 이전해 놓았습니다.   김해 김씨 삼현파 영종문중 종친회는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문중 사당에 모여 시제를 지내고, 정월에는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 문중의 사당은 김홍석 이사의 작은아버지인 김승선씨께서 큰 돈을 후원해 건립하였습니다. 김승선씨는 16세에 일본으로 징용을 끌려가서 모진 고생을 하다가 일본에서 사업을 하셨습니다. 이후 영종 고향에 김지선, 김순선, 김형선, 김예선 형제를 찾아오게 되었고 형제들과 뜻을 모아 사당을 건립한 것입니다. 후손들은 김승선 어른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었습니다. 이 일에는 종친들도 십시일반 후원하며 뜻을 함께 해서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금 종친회의 이사는 김동천, 김홍석, 김홍빈, 김홍명, 김동인 등 다수가 맡고 있습니다. 선조들이 열심히 뿌려놓은 씨앗으로 열매를 맺어가는 후손들을 살펴보면 인천대교 김수홍 전 사장과 과천시 총무과장 출신인 김홍흥씨, 현 경기도청 김동수 수산과장과 김귀남 남동경찰서 경감, 중구청 김홍남 농수산과장 등이 있습니다. 또 중구농협 초대 조합장, 옹진수협조합장, 중구 노인회장을 역임하신 故김홍범 조합장이 계시고, 인천시의원과 인천중구청장을 4번 연임하신 김홍섭씨도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 중구의회 의원과 중구농협 조합장, 중구청장까지 역임했던 필자도 문중 사람입니다.송도에서 신비라인 피부과 김홍병 원장, 중구청 김도경 인사팀장, 김동옥 보건과장,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김동환 과장도 모두 같은 문중입니다. 故김홍전 인천일보 전 논설실장님도 계셨습니다.   끝으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뜻있는 제안을 드립니다. 김해 김씨 영종문중이 이 지역과 국가를 위해 여러 공헌을 하며 걸어온 길에 LH에서도 함께 뜻을 이어가고 동참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지역주민들을 위해 일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오래 전부터 김해 김씨 삼현파 영종문중이 지역에 뿌려놓은 씨앗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아름답고 값진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지역주민들과 관공서, 기업들이 함께 힘을 모아 협력해 나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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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9-15
  • 무의도 발전을 이끈 인천 중구의회 차석교 초대 의원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보 자문위원장   변동불거(變動不居: 변하고 움직여 가만히 있지 않는다)   1991년 김영삼 정부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작으로 지방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인천 중구의회는 3월27일 선거를 실시하고 4월15일에 개원했고, 인천시의회 선거는 6월에 치러졌습니다. 중구의회에서는 영종동에서 필자와 용유동에서 차석교 의원이 당선됐고, 우리 지역 시의회의원으로는 이세영 당시 평화민주당 의원이 당선되었습니다. 당시 이 세 사람의 조합을 두고 궁합이 아주 잘 맞는 ‘삼형제’라며 주민들께서 축하해 주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무의대교를 건너 무의도 곳곳을 들러보면서 문득 인천 중구의회가 시작된 1991년 당시 차석교 초대의원님과 함께 했던 의정 활동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당시 지방의회 선거에서 용유동 주민 분포가 용유본동 2,200명과 무의동에 500명이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무의동에 거주했던 차석교 후보님이 당선되었습니다. 차 의원님은 무의 9통에서 11통까지의 도로 개설을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습니다. 그 당시 무의9통 큰무리에서 11통까지의 도로는 경운기조차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불편했는데 당선되고 차석교 의원이 발의하고 제가 동의함으로써 도로 개설의 단초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자비를 써가며 토지주 189명을 찾아 일일이 소통하고 도로개설을 위해 동분서주 바쁘게 뛰어다니셨던 차석교 의원님의 열정과 노력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특히 차 의원님은 당시 중구의회 의원 13명 전원을 무의도 현장으로 대동해 경운기를 타고 현장을 다니며 도로개설의 당위성을 설명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열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일이 근간이 되어 훗날 무의11통에서 소무의도(12통)로 인도교 교량도 놓이게 됩니다. 이때는 차석교 의원님이 수협조합장을 맡으실 때였고 저는 중구청장을 역임하면서 뜻을 같이 하였습니다.   차석교 의원님은 또 연안부두에서 무의도까지 오가던 ‘관광5호 여객선’이 손님이 줄어 운항을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관광객 유치’에 팔을 걷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호룡곡산과 국사봉 등산로 개발을 위해 주민들과 함께 자비를 들여 임야 소유주를 설득하고 중앙 언론을 통한 무의도 관광여행 홍보를 하게 됩니다. 그런 활동이 하나 둘 모여 관광객들이 점점 늘기 시작하고, 주민들이 힘을 모아 ‘실미도 자연발생유원지’와  ‘하나개해수욕장’을 관광지화 하여 지금의 사회적 기업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또 지금은 고인이 되신 무의10통 강충부 전 통장님께서도 힘을 보태주셨기에 하나개해수욕장이 주민의 소득 증대와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또한 실미도 재빼기길을 차석교 의원님이 당시 9,000만원이라는 거액의 자비를 들여 도로를 개설하면서 실미해변이 관광지가 되었고, 현재의 쏠레오 투자회사가 복합리조트 개발계획을 인천경제자유구역청에 신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관광지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덕교8통에서 잠진도길 바다에 폭 10m 도로를 개설하기까지 이세영 시의원과 차석교 구의원, 그리고 저 세 사람이 참 많이 연구도 하고 공무원들도 설득하며 오늘의 도로를 만들어냈고, 그 길이 무의해운 도선사가 운항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됩니다. 그 이후에 박상은 전 국회의원님의 뜻도 더해져서 지금의 무의대교가 탄생되었습니다.   이러한 업적 뒤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습니다. 1976년 차석교 의원님의 부친이 복통이 생겼지만 저녁에는 육지로 나갈 수 없던 시절이라 다음날 동이 트고 작은 배를 타고 육지로 이송하는 도중에 소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일로 차 의원은 섬 주민이기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설움과 아픔을 간직하며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부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무의도가 육지가 되어야 하고 육지와 통하는 길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차 의원님과 저를 비롯한 기초의회 일꾼들은 그 당시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일했습니다. 일례로 중구의회 건축조례를 개정하여 당시 옹진군에 있던 미등기 건축물을 양성화시켜 전부 신규 건축물로 등재할 수 있도록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역 사랑의 뜻이 모여서 무의도가 지금의 관광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자부합니다.   관광객 북적이는 현재 무의도의 모습은 아주 오래전부터 섬 사랑의 씨앗을 뿌려왔던 차석교 의원님의 노력인 것입니다.  무의 잠진도길, 소무의도 연육교, 무의대교 등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당시 ‘삼형제’ 이세영 시의원(전 중구청장), 차석교 구의원(전 수협조합장), 김홍복 구의원(전 중구청장/농협조합장)이 심어놓은 씨앗이 오래도록 값진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축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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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9-07
  • 가문의 얼을 이어가는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보 자문위원장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은 신석기시대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며 3·1운동을 함께 했던 조상의 얼이 살아 숨 쉬는 고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곳 용유동·을왕동에 위치한 늘목마을에 집성촌을 형성한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문중은 59대에 용유지역에 입향해 늘목마을에 집성촌을 이루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70대손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11대째 이 곳에서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이 곳에 입향한 59대 정세유 선조분께서는 세 아들을 두셨고 그 아들들의 후손이 지금의 정씨 용유문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재에는 당시 큰아들의 후손인 정동선씨, 둘째 아들의 후손 정영철·정영목씨, 셋째 아들의 후손으로는 정의훈(고인)·정성모씨가 계십니다.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 정성모 종친회장님을 만나서 가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67대손인 정성모 회장님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59대 선조분의 셋째 아들 후손으로 이 종친회를 7년째 맡고 계십니다. 종친회를 함께 이끌고 계시는 부회장은 정영철 남북동어촌계장님, 총무는 정종문씨(남북동교회 성도), 고문은 정봉훈 전 농협이사와 정지성 중앙 종친회장님입니다. 참고로 경주 정씨 중앙 종친회는 영등포 대방동에 있으나 앞으로 파주로 이주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시 선조들의 자취를 돌아보면 용유면장을 역임하신 정명환(고인)님이 계셨으며 정성모 현 회장님은 인천광역시에서 부이사관으로 정년퇴임하셨고 정지호 사무관(용유중앙교회 장로)도 계십니다.용유 남북동 옛 용유중학교 옆에는 3·1운동 기념비가 있습니다. 당시 13세였던 정영옥씨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정영옥씨가 여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남성이라고 합니다.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의 종중 선산은 늘목에 산 200평 정도가 있습니다. 매년마다 음력 10월 둘째주 토요일에 친척 30명 정도가 모여 시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경주 정씨 용유문중의 종친회는 1년에 한번 정기회를 하는데 시제날 같이 하고 임시회의는 연말에 하곤 합니다. 또한 종중간 애·경사에는 종친회 명의로 조화나 화환을 보내줍니다. 종중간의 소통과 화합을 위해 노력하시는 정성모 회장님의 노고를 볼 수 있었습니다. 정 회장님은 자칫 잊혀질 수 있는 가문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전자족보를 도입해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 일입니까. 정성모 회장님에 의하면 영종도에도 정씨 문중이 있었지만 578만평 규모의 영종 도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모두 뿔뿔이 흩어져 현재는 그 근황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다만 정기남(고인)씨가 영종문중 종친회장을 역임했던 것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정성모 회장님은 “선조들의 사상과 뜻을 잊지 말고 후대에서 또 후대에게 뿌리 사상을 이어가도록 해야만 하는데 지금의 젊은 후손들이 이 같은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걱정이 많이 됩니다”고 말씀하십니다.‘전분세락(轉糞世樂)’이란 말의 뜻처럼 ‘만일 다리 하나가 부러졌다면 두 다리가 모두 부러지지 않은 것을 하늘에 감사하라. 만일 두 다리가 부러졌다면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라. 만일 목이 부러졌다면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를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최악이 아님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살아서 숨 쉴 수 있어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걸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젊은 세대들이 왜 이 모양이지 하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나부터, 우리 종중부터 이념과 조상의 얼을 찾아 하나씩 그 뜻을 받들어 가면 그것이 가문의 얼을 이어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차근차근 주어진 여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다 보면 어느새 그것이 모여서 큰 성과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에서 비바람 없이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혜의 왕인 솔로몬처럼 정성모 회장님과 경주 정씨 용유문중의 특별한 지혜가 모아져서 서로 격려하고 지역을 사랑하는 종중으로 남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종중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중지를 모아 경주 정씨 제안공파 용유문중이 뜻깊은 종친회로 계속 나아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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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8-25
  • 삶의 향기가 아름다운 안동 장씨 영종파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보 자문위원장     긴마루라는 뜻을 가진 ‘영종(永宗)’은 문헌에 의하면 고려시대부터 자연도로 칭했고 당시 영종도에는 ‘경원정’과 함께 ‘제물사’라는 절도 있었습니다. 제물사는 송나라 사신들이 꼭 방문하는 필수 관광지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곳 영종도 운서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 온 안동 장씨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운서리 모랫말 마을을 중심으로 안동·인동 장씨의 후손들이 김포파에서 이곳으로 입향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은 무의도9통 큰무리 마을에 계시는 장원섭(77세) 종친회장님과 안동 장씨 영종파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무의9통 노인회장이신 장원섭 회장님은 12년 전부터 영종파 안동 장씨의 종친회장을 맡고 계십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는데 큰아들 장정민(52)씨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으며 둘째 아들은 남동구 서창동에 거주하는 장정재(49)씨입니다. 원래 안동 장씨 영종파는 운서4리 모랫말에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었으나 회장님의 고조부께서 용유와 을왕리 농토와 무의9통 방죽논 농토 관리를 맡게 되면서 큰무리에 정착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집안에는 묘자리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선조 한분이 지관(묘자리 봐주는 사람)이셨는데 지금의 무의10통과 11통 사이의 임야에 있는 산소를 보고 한곳은 부자가 될 수 있으나 집안이 병치레를 많이 할 터이고, 다른 한자리는 아들만 출산하면서 집안이 평안할 것 같다는 것인데 선조들이 두 번째 자리를 산소로 썼더니 정말 자손들이 아들만 출생했다고 합니다. 고전에서나 읽을 법한 이야기를 직접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의 미풍양속에서 나오는 생활풍토로 믿어집니다. 그때의 장원섭 회장님의 집안은 지관의 얘기대로 아들만이 번창하는 집안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동 장씨의 영종파 내력은 34대째이지만 영종의 내력은 21대에 영종으로 유입되었다고 기록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13대 정도가 영종파의 종중들이 이 지역에 뿌리내리고 터전을 일구어 갔다고 보여집니다. 안동 서호면에 안동 장씨 시제를 지금도 그 곳에서 지내고 있다고 하니 아마도 본 안동 장씨의 뿌리는 그 곳에서 출발했다고 봅니다. 영종파 안동 장씨의 종친회 모임조직 형태는 회장, 고문, 부회장, 총무, 이사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 종중 모임입니다. 장명수(80) 부회장님은 운서동 공항신도시에 거주하시고, 장태동(68) 총무님은 모랫말 출신이면서 시내 거주하고, 장성수(68)·장경동 이사님 등 종중의 뜻있는 분들이 함께 종친회와 연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고문은 모랫말 출신 장갑동씨가 맡고 있습니다. 영종이 섬으로 있을 당시 영종통운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2008년 영종도에서 578만평 토지보상 문제로 안동 장씨의 선산과 납골묘, 산소 등이 수용이 되면서 받은 보상금으로 지금의 하늘도시 운서지구에 3층 건물을 지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종친회를 운영하신다고 합니다. 월세를 모아 1억원 정도를 장학금으로 만들어 종중 자손들에게 장학사업도 계획하고 있고, 종친회 건물은 앞으로 쉼터를 만들어 시내에 거주하는 종친들이 고향을 찾았을 때 편하게 쉬어갈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한다고 하시니 이것 또한 애향정신이 아닌가 합니다. 영종에 입향한 21대 장서운 선친은 임진왜란 당시에 이곳에 입향하셔서 신입장군 종사관이라는 관직도 역임하셨는데 임진왜란 당시 전투에서 전사하여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22대는 명예직이지만 가선대부의 직함을 종중의 어른 역할을 했던 기록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33대 장익환씨는 교장선생님으로 지역에서 교육봉사 활동을 많이 하셨다고 전해집니다.   가장 아름다운 꽃은 생의 끝자락에 있다고 했나요. “우리가 이제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다음 세대가 이 가풍을 생각하면서 아름다운 영종파 안동 장씨라는 자손임을 자랑해야 할텐데...” 하는 회장님의 말씀 속에 뿌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영종·용유 애향가족들이 가치관을 가지고 종중의 반듯한 사랑을 자손들이 이어갈 그날은 우리 모두가 행복한 나날들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왕 솔로몬에게 무엇을 가장 원하는냐고 묻자 그는 지혜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선조들의 지혜를 우리가 보고 배웠듯이 사회생활에 접목할 수 있는 지혜로운 얼굴을 만들어야 합니다. 인생의 승패는 얼굴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항상 웃으면서 편안한 얼굴 이것이 우리 선친들이 지킨 가풍이라는 종친들의 말처럼 항시 행복한 사람,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그런 소중한 영종파 안동 장씨의 가풍을 이어가는 자손들이 되기를 축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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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18
  • 개발도상국에 영농기법 전수하는 실미원 영농법인
                  김홍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보 자문위원장   인천 중구 무의동 433번지 실미해수욕장 입구에 실미원 영농법인을 찾아 신순규 대표와 담소를 나누면서 진실한 농심(農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농사짓는 것이 어려운 일로 모두가 기피하고 있지만 식량이 무기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식량안보를 위해서라도 우리 농업의 맥을 이어가야 할 중요한 사업입니다.   현대의 영농은 다른 산업분야와 마찬가지로 선조들의 지혜에 기술이 더해져 과학영농으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선진 영농기술로 우리 농업을 발전시키는 영농후계자가 바로 실미원 신순규 대표입니다. 옥수수는 토양성분 정화용으로 심는다는 과학영농과 고추농사도 남들이 1개를 수확할 때 이 분은 3개를 수확할 수 있다는 농업기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친환경 농법 중 고추를 심고 사이사이에 옥수수를 심어 해충을 옥수수에 모여들게 한다는 지혜를 들으며 몰랐던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별이 있기 때문이란 말처럼 이런 농민이 있기에 우리 농촌이 살아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값진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곳 실미원 농장은 신순규 대표와 부인 장명숙씨, 아들 내외가 함께 지내며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들 신지용씨와 며느리 최은숙씨 부부는 농수산대학 학내 커플로 전공을 살려 영농법인을 훌륭하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부부는 요즘 보기 드물게 다자녀를 둔 가정으로 사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공항중학교 1학년인 신기훈, 용유초 무의분교 4학년인 영주, 3학년인 영은, 다섯 살인 영선, 세 살인 기영 5남매와 함께 3대가 모여 사는 모습에서 한없는 행복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공익적 차원의 목표가 뚜렷해야 농업을 할 수 있다’는 신순규 대표는 1988년 농업 경영인이 되었고, 2005년에는 ‘농업 신지식인’으로 선정돼 포도를 주로하고 다른 작물도 재배하는 복합영농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네팔, 에디오피아, 키에르키스탄 등 개발도상국에서 우리나라에 농업 교육을 받으러 온 외국인들에게 5년째 영농교육을 하고 계십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예년처럼 교육을 진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벌써 세 차례에 걸쳐 150명의 교육생을 배출했다고 합니다. 이 영농교육은 서울시가 교육비를 전액 지원해 개발도상국 농민들에게 친환경 농법을 전수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한번 교육할 때 정원이 20명 정도인데 40~50명까지도 지원자가 몰린다고 합니다.    신 대표는 농수산대학에서 현장 교수직을 수행하면서 그들이 고국에 돌아가서 농업의 선구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매뉴얼 교육만이 아닌 실물 중시의 자연농법을 가르친다고 이야기 합니다.  개발도상국 산업체 요원이 휴일이면 이곳을 찾아 농촌 일손 돕기도 하고 친환경 농업기술도 배우겠다고 찾는다고 하니 한국인으로서 뿌듯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앞선 농법을 개발도상국 농민들에게 전수하는 실미원 신순규 대표는 민간 외교관 역할을 수행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며 참 좋은 농심(農心)을 전하는 행동에 존경을 표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듭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농심을 가지고 계신 농업인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도 더해집니다. 식량 무기화 시대에 돌입한 현재 인천시의 농업 행정이 과연 선진농업을 지향하고 있는지 농업인으로서 묻고 싶어집니다. 실미원에서 운영하는 외국인 농업교육을 서울시가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인천시와 인천 중구의 농업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합니다.  ‘일월영측(日月盈?)’ 즉 해와 달은 차면 기운다고 합니다. 농업과 농촌이 살아야 지역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행정관청의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이 그 위치에 있으면서 주민들의 편에서 주민들을 위해 일하는 진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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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7-01
  • 물취이모(勿取以貌)
                    김 홍 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지 자문위원장 나이와 세대를 초월해 만날 수 있고 서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특히 꿈과 희망의 에너지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입니다. 최근 영종청년연합회 김병철 회장을 만나 차 한잔을 마시며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영종청년연합회는 50여명의 회원이 있으며 김병철 회장을 중심으로 운영이사 홍상기, 정봉규씨가 상하간 계층조율을 하고, 김진호 운영이사가 총괄 역할을 하며 연합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연합회는 중산동에 사무실을 두고 지역에서 여러가지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그 재원을 회원들의 회비로 충당한다고 하니 그 정성과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지역의 어른으로써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새해 첫 날 백운산 정상에서 따뜻한 음료와 차를 대접하기 위해 회원들이 손수 그 무거운 물을 이고 지고 정상에 올라와서 천명이 넘는 해맞이 주민에게 대접하는 이 청년들을 우리는 무심코 지나치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에게 대접한 한잔의 물은 255m 정상까지 지고 올라와서 정을 나누는 청년회원들의 땀이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외에도 사랑의 밥차 봉사활동과 지역의 환경 정화에도 늘 솔선수범하는 영종청년연합회 모든 회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회원들의 헌신은 멀지 않아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지리라 확신합니다. 김병철 회장의 ‘행복이 따로 있나요. 작은 일에도 서로 웃고 즐기고 함께 쌓아가는 것에서 오는 성취감이 바로 행복이겠지요’라며 미소짓는 얼굴에서 우리 지역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보았습니다.   김 회장은 영종 신불도 김상권씨의 첫째 아들로 만수중, 부평고, 연세대에서 축구를 하고 삼익악기실업팀에서 선수로 뛴 열정의 청년입니다. 옛 반길안 김용환씨의 둘째 딸과 결혼해 지금은 공항신도시 단독주택에서 아들 쌍둥이를 키우며 애향 가족의 대를 잇고 있습니다.     김 회장은 인천 유나이드 아카데미 영종지부장 감독을 하면서 유소년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꿈나무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4명의 코치와 함께 150명의 꿈나무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방과 후 축구 선수반은 2시간 수업을 하고 취미반은 1시간 30분 지도를 한다고 합니다.   10년 정도 유소년들을 지도하고 있는데 우수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습니다. 제자들 중에는 안산그리너스 선수인 고교 2학년 제자를 선두로 해서 서울 동북중학교, 숭실중학교, 인천 부평동중학교 축구부 등 유수의 축구팀에 스카웃되고 주전선수로 활약중이라고 합니다.   ‘운동을 가르치는 선생도 추구하는 철학이 있어야 되고 운동뿐만 아니라 바른 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운동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지는 학생들을 볼 때 비록 생활은 궁핍하지만 보람된 일을 하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젊은 지도자의 건강한 생각을 배우게 됩니다.   김병철 회장은 나를 위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안전거리’가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반화된 용어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오래 전부터 ‘안전거리’를 이야기 해 왔다고 하더군요.    김 회장이 늘 주위와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삶의 철학과 원칙을 세우고 살아가듯 삶의 목표가 반듯한 영종청년연합회 회원들의 앞길에 행복이 함께 하리라 믿습니다.   대인관계의 원칙 중에 나와 같이 있는 것을 상대방이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온화한 사람이 되라는 글귀처럼 참 철학이 투철하고 뜻이 같은 회장님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는 ‘물취이모(勿取以貌)’라는 고사성어가 김병철 회장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늘 츄리닝과 점퍼차림을 하고 있어 스포츠인으로만 보이지만 그와 담소를 나누면서 내가 오히려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겸손하고 진지한 얼굴에 운동선수답지 않게 어찌 그리 성품이 좋은지 참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축구를 배우려는 유소년들에게는 ‘꿈’을 갖게 하고, 지역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봉사와 실천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김 회장에게서 영종의 미래가 더욱 든든해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모든 일은 말없이 실천하라는 ‘무언실천(無言實踐)’의 경구처럼 김병철 회장과 영종청년연합회 회원들이 한 마음이 되어 지금보다 더 크게 뿌리 내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향기로운 단체로 지역사회에 우뚝 서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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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6-17
  • 복은 검소함에서 생기고(福生於淸儉)
                      김 홍 복  전 인천 중구청장 / 본지 자문위원회장   ‘가시와 잎’을 아시나요? 중구 마장포로 53번길 29에 있는 ‘가시와 잎’은 영종 7통장 박웅찬 부부의 농장으로 딸 박정실 양이 처녀 농군으로 같이 희망을 일구고 있는 곳입니다. 이 농장은 코로나19로 지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힐링의 장소입니다. 생명의 신비함을 느끼고 즐거운 힐링의 시간을 같고 싶다면 이곳의 방문을 추천합니다. ‘가시와 잎’은 인천에서는 유일하게 선인장과 다육식물로 농촌교육 체험농장에 선정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 농장을 운영하는 박웅찬 통장님에게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복한 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참으로 복은 검소함에서 나오고 이 분은 선구자의 길을 걷고 계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 대표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 수양의 근본을 물이 가진 덕목에서 찾는다고 하는 이야기처럼 이 분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함과 포용력, 융통성, 용기 등 참 많은 지혜 체화해서 인생의 철학으로 갖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시와 잎’ 농장에서는 큰 규모의 하우스 3동에서 다육이와 선인장을 재배하고, 석화사 밑에 있는 농원에서 체험과 교육을 통해 힐링 농장의 자부심을 일구고 있습니다. 박웅찬씨는 마당개 통장을 역임하면서 농업인들과도 소통을 아름답게 이어가는 통장님이셨습니다.   선인장 가시처럼 까칠한 이웃도 있지만 서로 이해하고 조금씩 양보하면서 까칠한 가시는 부드러운 잎으로 변하고 그렇게 주민들은 서로 조화를 이뤄가며 아름다운 영종 7통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농부의 마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체험 교육 일정을 9월로 잡고 있다고 하니 방문객이 끊긴 이 시기가 많이 힘든 때 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정상적으로 체험과 교육 농장 프로그램을 할 때도 재료비가 많이 들어가지만 소비자의 마음을 먼저 헤아렸다고 합니다. 화분이나 꽃도 다른 곳에 비해 좋은 것만 쓰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농심의 마음을 먼저 생각했다고 하니 이것이 진정 우리의 생명 산업을 일구는 마음일 것입니다.   올해는 아직까지 단체 체험이나 교육을 코로나19 때문에 못하고 있지만 개별적으로 이곳을 찾아와 정성껏 기른 다육 식물을 관람하고 농장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힐링하는 방문객들을 보면서 꾸준한 노력의 결과로 농업경영체에 등록된 부부와 딸의 자긍심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농장에서 정성껏 기른 다육이를 판매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영종의 보석을 주민들이 많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한 번 방문해서 힐링도 하고 진실한 마음 가득담은 다육이도 분양받아 두고두고 보실 것을 권해 드립니다.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들이 분석하는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는 멈추지 않는 인간의 탐욕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보이지도 않는 그것은 자연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바로잡으려는 메시지가 있다고 봅니다. 자연과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면서 사는 진실한 농심을 되찾는 것 또 작은 생명에서 그 농심을 볼 줄 할고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해야 하는 것이 코로나가 주는 교훈이 아닐까요. 각양각색의 다육이들을 보면서 정성을 다하는 농부의 마음을 읽어 봅니다.     ‘선인장의 가시처럼 따갑고 까칠한 마음은 선인장 친구들에게 남겨두고 가세요. 다육식물의 잎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은 다육 친구들을 보며 힐링하고 가세요’라는 ‘가시와 잎’ 농장의 메시지를 보면서 영종의 많은 주민들도 이곳에 와서 건강한 농부의 사랑을 듬뿍 받은 다육이를 보고 웃을 일 없는 지친 일상을 잊고 환하게 미소짓는 편안한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가시와 잎’의 방문을 다시 한 번 추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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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6-03
  • 오유지족(吾唯知足)
                    김홍복 전 인천중구청장 / 본지 자문위원장   향기로운 마음은 남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다. 영종소방서 안전교육대 장경동 회장님이 봉사활동하는 모습을 보며 남과 비교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 만족하면서 주위에 귀감이 되는 아름다운 모습을 봤다. 영종소방서 안전교육대는 회원 24명이 활동하며 부대장 김현호씨, 총무부장 강신택씨가 함께 공감대를 형성하고 지역 봉사에 앞장서고 있다. 평소 심폐소생술 교육하는 모습을 보고 참 좋은 일을 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지난 3월 우연한 기회에 운서동 약국에서 마스크 판매업무 봉사활동을 하시는 것을 목격했다. 진정 ‘오유지족’이란 말이 떠올랐다. 마스크 판매 외에도 회원들과 함께 영종동, 운서동에서 자원봉사를 꾸준히 하고 계신다는 말을 듣고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미담 사례를 소개하고 싶다. 이런 분들 덕분에 우리 사회가 살맛나는 세상이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안전교육대 회원들이 하루 2~4시간 정도 봉사활동을 하면 소방서로부터 만이천원 정도를 지원받는다고 한다. 회원들은 이 지원금을 모아 지역 소외계층에게 물품을 구입해 기부한다고 하니 참 아름다운 일이다. 심폐소생 교육을 할 때도 운서동 소방공무원께서 교육에 함께 참여해 주신다고 하니 이 지면을 통해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   장경동 회장님은 의용소방대 경력이 20년이 되신다고 한다. 20년 전 장홍옥 의용소방대장의 소개로 봉사를 시작해 지금은 중구농협 비상임 이사로 3년째 근무를 하시며 운서동 지역 사회보장 협의회에서 활동하며 소외계층에 도시락 배달 봉사도 하고 계신다고 한다. 소외계층과 소통의 장을 만들어 가시는 회장님의 남다른 성품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또한, 중부경찰서 공항지구대 생활안전협의회 회원이기도 해서 늘 협동정신과 자원봉사로 지역 주민과 공감대 형성에 앞장서고 계시다. 이렇게 아름답게 살아가는 분들 덕분에 우리 섬이 행복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매년 1월 1일, 인천공항뉴스가 해맞이 행사를 하고 명품관에서 떡국 1,200그릇을 주민들에게 대접할 때, 장경동 회장님은 떡국 봉사를 해주셨다. 영종동 남듸 마을의 다복한 가정에서 생활하시다 수년전 영종도 보상이주 계획 때 운서동 신도시로 이주하셔서 슬하에 1남 2녀를 둔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셨다고 한다. 지역의 뜻있는 일에 언제든 앞장서서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 주시는 모습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세월은 속절없이 흐른다. 봄이 오고 꽃이 피는가 싶으면 다시 또 꽃이 지고 봄도 지나간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을 순 없지만 그 시간 속에서 장경동 회장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더 깊이 마음에 품어 두어야 한다. 장경동 회장님과 회원들의 생각이 지역민과 함께해 사랑을 베풀어가는 선행이 이어지면 좋겠다. 특히 지역의 후배들이 아름다운 동행에 참여해서 지역사회의 귀감이 되면 좋겠다. 깨우침을 위해 세상의 유혹을 떨치고 머리카락을 자르며 공부하는 스님처럼 꾸준하게 한 길을 걷는 집념이야 말로 성공의 지름길이다. 영종소방서 안전교육대가 지역민과 소외계층에게 헌신하는 단체로 자리매김해서 우리 지역을 밝히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을 밝히는 등불이 되길 소망해본다. 인생을 살다보면 편한 길도 있고, 굽은 골목도 나오기 마련인데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을 때에도 굴하지 않는 집념을 보이는 봉사단체가 되길 바라본다. 장경동 회장님과 회원들의 헌신이 있다면 어떠한 시행착오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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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4-22
  • 노신사의 ‘미스터트롯’ 관람기
                    김홍복 전 인천중구청장 / 본지 자문위원장   얼마 전 모 방송사의 경연 프로그램 ‘미스터 트롯’ 결승전이 36%대의 시청률을 보여 국민들의 인기를 실감 했다고 한다. 밤 10시에 시작해 새벽 1시가 돼야 끝이 나는 이 프로그램은 노년의 시간을 웃고 울렸다. 우리 전통 트롯을 통해 시청자의 심금을 울리는 7인의 결승전 가수들을 보니 정말 노래를 잘한다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결승전 투표에서 칠백만 명이 넘는 시청자가 문자투표를 해서 문자 당 100원인 정보이용료가 7억원이나 모였다고 하니 TV 예능프로에서 전무후무한 일이 아니었겠는가싶다.   나 역시 목요일 밤이 되길 손꼽아 기다리며 ‘미스터 트롯’을 기다리곤 했다. 성악을 전공한 가수, 무명 시간을 꿋꿋하게 버텨온 가수 등 꿈을 잃지 않고 힘든 시간을 이겨낸 지원자들의 성숙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예선에서부터 많은 경연을 거쳐 승자만이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그 곳에 오르기 위해 도전했던 보이지 않은 많은 이들에게도 찬사를 보내고 싶다.   산업화 시대를 거친 우리는 흔히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는 시대에 살았다. 그런데 요즘 사회구조는 그 때와는 많이 다르다. 집안의 경제력에 따라 출발선이 다르기 때문에 그 결과도 대부분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 현실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꿈을 갖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희망을 갖고 살기 어려운 이 시대에 미스터 트롯이 하나의 희망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곳에서든 주어진 일에 충실하고,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나간다면 꼭 희망의 씨앗이 자라날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좋은 날만 있지 않고, 비 오는 날도 있고 그늘이 드리우는 날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이겨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 갈 때, 성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전하는 젊은이들에게서 또다른 희망을 보았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어려운 시기, 삶이 힘들어도 희망의 씨앗은 계속 심어야 한다. ))    얼마 전 농협에서 근무할 당시 함께 일했던 지인과 점심식사를 했다.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현직에 있을 때는 외식도 자주하고 식사도 골라했는데 현직을 떠난 지금은 잘 먹지 않던 설렁탕도 왜 그리 맛있는지 모르겠다며 이제야 그 맛을 알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역시 한 번 성한 것이 영원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것이 인생의 진리임을 깨닫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겠다.   주위 사람도 용서하고 자신도 용서하는 마음이 치유에 가장 좋다고 한다. 욕심이 차있으면 불행의 씨앗이 자라기 때문이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곳곳에서 혐오와 차별이 눈에 띈다. 인생이란 허무하게 흘러가는 것인데 이런 감정적 소모로 인생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목마름에 단 비를 기다리듯 시간도 그렇게 또 흘러갈 뿐이다.   미스터 트롯을 보며 새들이 둥지를 틀 수 있도록 우리 세대들이 선구적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삶이 힘들어도 희망의 씨앗은 계속 심어야 한다. 우리가 새벽까지 미스터 트롯을 넋을 놓고 본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방송을 통해 보여준 삶의 애환이 오늘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희망과 함께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하면 모두가 그 자리의 주인이 된다는 교훈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모두가 어렵고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다. 이 경험이 소중한 자산으로 바뀔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자신의 길을 찾는 젊은 일꾼들이 되길 바란다. <김홍복 농협재단이사, 본지자문위원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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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4-02
  • 운서어촌계의 희망
      김홍복 전 인천중구청장 / 본지 자문위원장 삼목 정주항의 진입로를 개선해 지역 활성화가 시급하다. 중구 공무원과 인천공항공사의 관심을 촉구한다. 구정명절 연휴에 운서어촌계 김덕래 어촌계장님과 담소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 역시 운서어촌계의 계원으로 어촌계 방향에 뜻을 같이 하고 있기에 우연한 이 기회가 참으로 반가웠다. 현재 운서어촌계는 계원들이 어업활동을 이어가며 어촌계 활성화를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계원 172명의 운서 어촌계는 자체 대의원 13명과 감사 1명, 총무 1명으로 구성되어 작지만 짜임새 있는 운영을 하고 있다. 어촌계의 자산은 현금 4천만원과 어장관리선이 있는데 어장관리선도 어촌계장님이 직접 관리하신다고 한다. 작은 조직이지만 알뜰하게 운영하고 계신 김덕래 어촌계장님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런 분들이 지역에 뿌리내리고 있기에 우리 사회구조가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고 믿는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뜻을 같이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앞장서서 조직을 이끌어 계원들의 뜻을 하나로 모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십대의 젊은 패기로 피로감도 잊고 조합원의 요구를 앞장서서 해결하는 어촌계장님의 모습은 진정한 바다사나이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서어촌계에는 50명 정도의 계원이 또 다른 열정을 가지고 맨손 어업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어선 40척이 삼목 정주항을 이용해 어업활동을 한다. 특히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삼목 정주항이 피항항구 역할을 하며 60척 정도가 이곳을 이용한다고 하니 선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되는 항구임이 틀림없다. 제주도 대정항에 중국 어선들이 피항하는 것처럼 인근의 새우젓 배들을 포함한 어선들이 삼목항으로 피항한다고 하니 이곳을 우리가 잘 지켜내야 훗날 더 아름다운 어촌이 되리라 확신한다.  1차 산업의 역할을 운서어촌계의 힘으로 만들어 갈 수 있을 때 지역을 활성화 할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삼목 어촌 정주항이 더욱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중지를 모아야 할 때이다. 지금은 항구가 작아서 물동량이 폭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공무를 담당하는 분들의 대책을 마련이 필요하다. 특히 수산물 직판장의 진입로 문제가 가장 큰 문제점인데, 필자 역시 정주항을 찾으러 한참을 헤맸던 경험이 있다. 앞으로 신도를 거쳐 강화도로 ‘평화의 도로’가 놓일 예정인데 그 때 이곳의 진입도로가 서울, 인천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와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길이 꼭 필요하다. 관계자 여러분들이 이곳에 대해 꼭 한번 고민해주시고 어촌계원들의 바램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란다.  선주협회 장영문 회장님의 큰 역할도 있었지만 함께 생각을 공유하는 조직으로 남을 수 있도록 더욱 공감대를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업활동에 안창남, 최성종, 김성호, 이순만, 최세종 선주들께서 정말 열심히 앞장서서 일하는 모습에 모두가 열정을 담아 드린다. 어촌계장님은 이제 3년 째 어민과 소통을 하고 계시는데 계원님들의 자부심 속에 어촌 생계에 필요한 시설을 먼저 생각하고 앞장서서 계원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점에 계원들이 늘 감사함을 갖고 있다. 그래서 계원들과 소통과 공감대를 늘 형성하고 있어 경자년 3월 정도에는 맨손 어업인들과 1년 작업 계획을 또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것에 원칙을 세우고 함께 동참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모습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을 처리하면서 수익을 창출하고 그 수익금의 일부를 어촌계원 모두의 조합원 출자금 증대에 앞장서는 모습은 타 어촌계가 본받아야 할 일이다. 또한 구정에는 계원들에게 따뜻한 선물도 잊지 않은 젊은 어부 김덕래 어촌계장님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곳은 또 해넘이 명소이기도 하다. 삼목 정주항 입구에 옛 모래부두 터에 해넘이 조망대를 만들면 더 좋은 명소가 될 것이다. 삼목 정주항과 신도로 다리가 놓아지면 이 지역이 더욱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가 필요하다. 현장에 답이 있다. 구청이나 공항공사 관계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찾아와서 어촌계원의 목소리를 듣고 현장에서 답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바다 사나이들은 늘 한결 같다. 어민들의 소망이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다시 한번 공무원들과 공항공사 관계자들이 바다에 기대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를 바란다. 작은 노력들이 모아지면 훗날 이 곳이 활성화된 어촌 정주항의 대명사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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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복의 애향가족이야기
    2020-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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