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1(목)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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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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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7-13

실시간 목회단상 기사

  • 목회단상 > 풍성한 삶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언젠가 누군가의 장기기증으로 6명이 '새삶'을 얻은 사례를 뉴스로 본 적이 있다. 의학 드라마를 볼 때, 한 번씩 장기기증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기도 했다. '장기기증'이라는 개념이 내 머릿속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해야지...'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왔던 것 같다. 이번 주 주일 설교 말씀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누구나 죽는다. 불사신은 없다. 영원할 것만 같은 삶의 모든 부품들이 다 죽음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인간은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죽으면 다 끝'이라면 삶의 가치는 저하되고, 삶의 목적은 무난하게 살다 가는 것이나 혹은 언젠가 사라질 것들에 메인 것이 되지 않을까. 하나님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이 글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목적은 사실, 내가 너무 사랑하고 놓치고 싶지 않은 인연 중 혹시라도 죽음에 대해 사색하거나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믿는 이 소중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이다. 사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죽음이 무겁고 어두운 주제 같지만, 죽음 이후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확실히 믿기에 그리 두렵지는 않다. 본 적도 없는, 경험하고 온 사람도 없는 천국을 믿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안다. 그렇기에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가장 선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천국을 소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막상 장기기증 서약을 하려고 실행에 옮기니 내 마음에 불안함이 생겼다. '내가 이 서약을 하는 순간 죽음이 내 코앞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데?'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면서도, 사실 마음속에서는 이 세상을 더 살다가 가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이었다. 아직도 나는 이토록 연약하다. 어쩌면 삶의 끝까지 넘어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할 예정이다. 주일 말씀을 참고하자면...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 너머의 영원한 구원과 우리 존재에 대해 생각지 않습니다." "죽음을 가까이 두게 될 때, 회개와 순종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성화가 촉진되며 하늘의 소망을 견고히 잡게 됩니다. " ?그래. 죽음을 가까이 둔 채로 살고자 하는 한 걸음으로, 주어진 시간들로 빛나고 풍성한 삶을 만들길 바라는 뜨거운 마음으로, 장기기증 서약을 해야겠다. 사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 당장 부르시진 않으실 것이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기에! 그러나 분명하게 다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언제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서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살자. 죽는 그 순간에도 장기기증으로 생명의 복음을 전하자. 내 삶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잊지 말자.  주(註): 이 글은 ‘죽음, 그 이후’ 설교를 듣고, 장기기증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딸 아이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입니다.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믿고 있는 바를 알리고자 소통하는 글을 본인의 허락을 받아서 올립니다. 고난주간,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묵상하며, 우리는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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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3-27
  • 목회단상 > 내 편이 아니라도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요즘 대한민국이 위태로운 실정입니다. 구한 말 외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지도자들은 편을 나누어 대립하다가 일제 식민지라는 깊은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오늘은 한국은 미국과 중국을 양대 축으로 하는 신냉전, 북한의 핵무장 현실화, 경제 전쟁의 여파를 맞고 서 있습니다. 온 국민이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정치인들은 증오의 정치를 펼치고 있습니다. 증오로 가득 찬 사람들이 나라를 끌고 간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다윗은 사울에게 오랜 세월 정치적 탄압을 받아 피신을 다닙니다. 그러다가 사울이 죽고, 유다 지파의 추대로 다윗은 왕으로 등극합니다. 드디어 다윗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힘을 가지게 되면 오만한 마음에 그 힘을 휘두르고 싶은 함정에 빠집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시험이 왔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의 시신을 생명을 걸고 찾아와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내줍니다. 그때 누군가 다윗에게 이를 친절하게 고자질합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의 편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의 편이 아닌 야베스 사람들을 죽이거나 불이익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울에 대한 ‘신의’를 지킨 것을 높이 평가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다윗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신의’ 이구나. 내 편이 아니라 할지라도 신의를 지킨 사람들을 축복하고 상을 주네, 신의를 지키면 다윗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그러면서 다윗에게 생명을 거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더 큰 가치를 인정해 주니까, 더 큰 민심을 다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용사들이 모이면서 다윗 왕국은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준 바로 세워야 합니다. 니편 내편 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를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적대 감정, 패거리 의식만 가지고 일을 하면 끼리끼리만 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이가!’를 외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지킬 가치는 사라지고, 우리 편만 가르는 현실은 미래를 암울하게 합니다. 자기편을 규합하기 위해서 분열을 야기하여 국가의 하나 됨을 방해하며, 함부로 떠드는 사람은 리더가 되면 안됩니다. 리더는 하나 됨을 이루는 자질을 가져야 합니다. 밝은 미래를 열어 보일 비전을 제시하면 됩니다. 어려운 시절에 나라를 니편 내편 적을 만들어서 유익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공동체를 위하는 방식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방식 위에, 공동체를 위한다는 큰 가치가 동일하다면 서로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존중이 있을 때에 큰 틀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어려운 시대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12:18) 오늘 모두가 성경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가 만일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면, 편견을 버리고 소중하게 여기세요.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기뻐하시며, 덤으로 그와 같은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만남의 축복들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성숙한 공동체는 다윗의 왕국처럼 강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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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3-20
  • 목회단상 > 가시가 사랑의 흔적이 되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새벽에 알람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키는 절차는 매번 힘이 듭니다. 일단 핸드폰으로 찬양을 틀어놓고, 한참을 침대에서 누운 채로 운동하며 아쉬운 잠을 몰아냅니다. 요즘은 주로 사순 절기 찬양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흔적들을 묵상할 때마다 큰 은혜가 됩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의 흔적이 지나온 내 삶의 역경을 이겨내도록 하는 능력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프랑스 개신교인을 ‘위그노’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파리 비스콘티(Visconti) 거리에 프랑스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세웠습니다.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매의 날, 카톨릭 성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개신교인들에 대한 대학살이 시작됩니다. 사흘 동안 파리에선 3천 명, 프랑스 전역에는 3만 명 넘는 위그노가 학살당합니다. 파리의 개신교회는 이날 이후로 대학살의 신호였던 종소리를 생각하며, 교회에서 종을 울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상을 의학적 용어로 ‘트라우마(Trauma)’라 합니다. 재난 후 생기는 심리적 상처이지요. 누구에게나 이런 트라우마(상처)가 있습니다.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도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육체의 가시가 생활 속에서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사역에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그 육체의 질병을 ‘사탄의 사자’로 표현했습니다. 그 아픈 증세가 나타나기만 하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치료받기 위해서 세 차례나 작정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응답은 이렇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12:9) 예수님의 응답은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식과 열정과 동역자 등 더 많은 은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응답은 육체에 가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응답입니다. 육체의 가시가 바울을 겸손하게 만드는 도구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겸손해지면 은혜가 유지되고, 더 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높여주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도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9) 라고 고백하며 약한 것들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능력임을 선포했습니다. 십자가는 약한 것이 능력이 되는 대표적 사건입니다. 고난과 수치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능력과 구원과 사랑의 십자가로 바꾸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가시는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가시를 은혜의 흔적으로 만드십니다. 그 흔적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흔적입니다. 지난날 저의 삶의 가시와 같았던 약함을 생각해 보면, 정말 그 모든 약함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닌 육체의 가시, 트라우마, 삶의 고통과 아픔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가시’를 ‘십자가 사랑의 흔적’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사순절을 지나면서, 찬양을 듣든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드리든지, 말씀을 듣든지, 경건한 독서를 하든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자신에게 모아 보세요. 특별히 아프게 하는 ‘가시’가 십자가 사랑의 흔적이 될 때까지! 그때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보며 예수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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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3-13
  • 목회단상 > 신앙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장윤석목사(하늘사랑교회)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루를 기도로 시작합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깁니다. 밤이 되면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재리에 밝은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 이익이 되는 곳이 어디인지를 살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돈을 버는 일에는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저녁이 되면 자기의 육체적 즐거움을 위해 돈을 씁니다. 두 사람이 강에 들어가 고기를 잡았습니다. 누가 고기를 더 많이 잡았을까요? 재리에 밝은 사람이 훨씬 더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고기는 기도로 잡는 것이 아니라 기술로 잡는 것입니다. 재리에 밝은 사람은 고기를 잡기 위해 물살이 어떠한지, 어디에 고기가 많이 모이는지, 어떤 미끼를 써야 하는지를 부지런히 살폈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고기가 자신의 그물로 들어오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기도는 신앙의 문제이고, 고기잡이는 기술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좋은 사람보다는 기술이 좋은 사람이 고기를 잘 잡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은 신앙이 좋은 사람보다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요구합니다. 학생이 좋은 성적을 얻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기도만 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신앙은 깊어지겠지만 성적은 안 나옵니다. 기도는 신앙의 문제이고, 성적은 기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은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기술도 경시하지 않습니다. 신앙으로 열심히 기도했으면, 기도한 방향대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기도만 하고 일을 안 하거나 일을 잘하지 못하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기도만 하고 사과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신앙에 대하여 성경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6:7)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은 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공부 잘하고 싶으면,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기도로 공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돈을 벌고 싶다면, 돈 버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일을 열심히 잘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신앙이 없이 일만 열심히 하면 육체의 열매만 거둘 뿐이지만, 신앙으로 열심히 일하면 성령의 열매, 영생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6:8)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일하는 사람 중에 역사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열심히 일하여 뭔가를 이룬 후에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이룬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유지하고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겸손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4-03-06
  • 목회단상 >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무슨 일이든지 마음 먹기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 어떤 일을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는 하지 못할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 냅니다. 반면 하려고 하는 마음을 먹으면 해낼 수 있는 길을 찾습니다. 어떤 역도 선수의 한계는 200㎏ 입니다. 아무리 해도 201㎏, 그깟 1㎏을 더 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코치가 200㎏과 201㎏ 역기를 나란히 놓고 들도록 했습니다. 역시 이번에도 200kg은 들었지만 201㎏는 들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가 들어 올린 것은 201㎏ 역기였습니다. 코치가 숫자를 바꿔놓은 것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한계가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문제는 마음먹기가 힘듭니다. 이미 마음에서부터 자신의 한계가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도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 그 선에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선을 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별명은 ‘히브리’ 사람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강을 건너다’는 뜻입니다. 즉 ‘히브리 사람’은 강을 건너 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강을 건넌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라는 애굽과의 경계선을 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이전의 자신은 죽었고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은 모두 도무지 넘을 수 없었던 강(선)을 건넌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영 새마음을 받았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한계를 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입니다. 휴식 시간에 잠깐씩 ‘응답하라 1988’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을 새록새록 추억하며 그땐 그랬었지하며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등장인물 중에서 ‘김정봉’이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심장이 약해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렇게 살아서 뭐가 되겠나’ 싶을 정도로 엉뚱합니다. 정작 해야하는 공부는 하지 않고, 다른 일에는 몰입하다 보니 7수 만에 겨우 법대에 갑니다.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고 기뻐합니다. 기쁨도 잠시, 요리로 인생의 승부를 걸겠다며 사법고시 준비를 접고 집 앞 치킨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엉뚱하고 모자란 듯 하지만,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주관이 뚜렷합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여학생과의 연애에도 성공합니다.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캐릭터입니다. 가장 뒤쳐진 듯하지만 사실 가장 앞서가는 캐릭터입니다. 사람의 머릿속에는 하루에 5만 가지 생각이 스쳐 간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무엇이든지 참된 것을 생각하라”는 빌립보서 4장 8절 말씀처럼 생각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습관을 한 번 바꾸어 봅시다. 아침에 일어나 먼저 새벽기도를 드려봅시다. 매일 성경을 읽고 공부해 봅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됩니다. 고난 조차도 마음 먹기에 따라서 선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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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2-21
  • 목회단상 > 온 세대가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축복
          예배는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와 축복을 예배를 통하여 주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복된 인생으로 변화를 입습니다. 앤드류 존슨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13살부터 양복점 점원으로 일하고, 18살에 구두 수선공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무학인 그는 아내에게 글을 배웠습니다. 이후 열심히 공부해서 독학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땄고, 주지사, 상원의원, 부통령을 거쳐, 17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반대하던 사람들은 초등학교도 못 다닌 양복쟁이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며 조롱 섞인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모든 지혜와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알래스카를 소련으로부터 720만 달러에 사들였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얼음으로 덮인 쓸모없는 땅을 뭐 하러 사는가. 무식한 대통령이 하는 짓이 그렇지 뭐 별수 있느냐며 비아냥거렸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 땅의 가치를 몰랐지만, 이것이 미국이 세계에서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출신과 학력,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홍수 때 방주를 준비한 노아, 우상을 만드는 집안의 아브라함, 사기꾼 같은 잔꾀의 명수였던 야곱, 노예로 팔려가 종신 감옥의 죄수였지만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 나일강에 버려진 아기였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된 모세, 개처럼 취급받던 이방인이지만 유다 지파의 족장이요 가나안 정복의 영웅이 된 갈렙, 부모와 형제들에게 무시당하다가 왕이 된 다윗, 포로로 끌려간 소년이었지만 바벨론에서 총리가 된 다니엘 등 헤아릴 수 없는 증언들이 있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을 만나면 놀랍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릴리호수에서 밤새 그물질하며 어부 생활로도 변변찮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된 후에 위대한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살인자요 박해자였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 세계 역사와 문명과 영적 세계를 바꿔버린 사도 바울, 그리고 수많은 초대교회 성도들 등 그 이름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이름 속에 나의 이름이 들어가고 바로 나의 자녀들 이름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온 세대가 함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비전을 선포하고 도전합시다. 하나님께서 성취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8-19)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슥4:7)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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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2-07
  • 목회단상 > 믿음으로 선포하고 도전합시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미국의 풍자 문학가 마크 트웨인의 소설 중 ‘왕자와 거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렇습니다. 17세기 미국 런던 가에 두 아이가 태어납니다. 하나는 빈민가에서 자라서 소매치기 거지가 되고, 하나는 왕의 아들로 태어난 왕자입니다. 소년으로 자란 이 둘은 우연히 만나서 서로 역할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거지는 평생 왕자처럼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고, 왕자는 왕궁에서 벗어나서 맘대로 다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꾸었는데, 누가 더 힘들었겠습니까? 왕자는 아무나 못 합니다. 손 씻고 먹어야 하고, 공부하는 척해야 하고, 뭘 하나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더기 같은 허물과 죄의 옷을 입었던 자입니다. 그랬는데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경 벧전 2장에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신분이 바뀐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왕의 자녀가 되었지만, 옛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분을 갖춘 우리의 행동 기준은 이제 하나님 말씀에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습니다. 변함없는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새해에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가까이하고, 읽고 듣고 쓰고 낭독하고 암송하며 실천합시다. 하나님 말씀으로 은혜를 받아서 옛사람의 옷은 벗고, 새사람의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길 바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을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롬 12:1) 우리는 어느 때보다 힘든 격량의 시기에 한 해의 출발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라면 축복의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통하여 2024년도 “선포하고 도전하라”라는 표어를 정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내 앞에서 평지가 될지어다!” 선포하고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믿음으로 첫 돌을 놓을 때,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14일간 ‘신년 특별새벽기도회’를 통하여 매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선포합시다. 2024년도가 축복의 시간으로, 축복의 땅으로 열릴 것입니다. 오늘 신년 감사주일 예배를 드리는 모든 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감동을 따라서, 믿음으로 뜻을 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뜻을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일 선포하며 실천하여 나가길 바랍니다. 2024년도 축복의 시간 속으로, 축복의 땅을 향하여 나아갑시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스가랴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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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1-17
  • 목회단상 > 루돌프 사슴코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메리~크리스마스~! 교회마다 거리마다 다시 성탄절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은 온 세상에 기쁨이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성탄의 기쁨이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함께 하길 축복합니다. 성탄절 전날에 할아버지와 손자가 산책을 하고 있습니다. 산책로 옆 산 저쪽에 불이 났습니다. 그때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무어라고 말했을까요? "산타 할아버지!“라고, 소리쳤답니다. 제 가족들이 이 글을 보면 ‘날씨도 추운데 더 춥게 만든다.’라고 타박을 먹을 것 같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성탄 시즌, 들뜬 기분에 하나 더! 북극지방 얼음마을에 예쁜 사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들뜹니다. 이유인즉슨, 올해는 산타 할아버지의 썰매를 누가 끄나? 입니다. 사슴들은 그해 산타 썰매를 끄는 일에 선발되기 위해서 미리부터 달리기 연습도 하고 다이어트도 하는 등 야단이었습니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발되어 썰매를 끌게 되면, 일약 스타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칭기즈칸’입니다. 다리가 튼튼하고 용맹스러운 데다 맹훈련까지 하고 있습니다. 정작 칭기즈칸은 ‘베토벤이 문제야. 그 친구는 평소에 콩나물을 많이 먹어서 리듬을 잘 타면서 달린단 말이야...’라며 내심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쟁쟁한 사슴들 사이로 웬 볼품없는 사슴이 등장합니다. ‘아니 저게 누구야! 야! 루돌프 사슴코 여긴 웬일이야.’ 루돌프는 뚱뚱보에다, 딸기코에다 아주 볼품없는 사슴이었습니다. ‘어디 스타들 겨루는데, 끼어들어!’라며 모두가 핀잔을 주었습니다. 사슴들은 루돌프를 놀리며 노래를 부릅니다. ‘루돌프 사슴코는 매우 반짝이는 코, 만일 내가 봤다면 불붙는다 했겠지’ 루돌프 사슴코는 주먹코에다가, 정말 붉은 코라, 붉은 전구를 꽂아 놓은 것처럼 반짝였습니다. 드디어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그날따라 안개가 많고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타 할아버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큰일 났네, 이렇게 안개가 많이 끼어서 앞이 안 보이니, 사고라도 나면 어쩌나...’ 그런데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옳지, 루돌프가 있었지, 루돌프 코는 매우 반짝이니까 짙은 안개 속에서도 잘 달릴 거야’. 그리고 노래를 부릅니다. ‘안개 낀 성탄절 날 산타 말하길, 루돌프 코가 밝으니 썰매를 끌어주렴~’ 그래서 사슴들의 예상을 뒤집어엎고, 칭기즈칸, 베토벤 등 뛰어난 선배들을 물리치고 루돌프가 선발되었습니다. 볼품없고, 외로운 루돌프가 안개 때문에 올해의 성탄절, 산타의 썰매를 끄는 스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노래가 들려옵니다. ‘그 후론 사슴들도 그를 매우 사랑했네, 루돌프 사슴코는 길이길이 기억되리’ 여러분! 한계에 부딪혀 실망하지 마십시오. 안개와 같은 현실 문제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딸기코, 주먹코, 뚱뚱보 루돌프도 그 안개 때문에 스타가 된 것처럼, 우리 인생의 앞날에도 오히려 그 안개 때문에, 돈 많고 똑똑한 사람보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스타가 될 수 있습니다. 성탄절은 예수님 오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에 믿고 모신 사람은 구원받게 되며, 영원히 복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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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3-12-20
  • 목회단상 > 믿음의 결국은 해피엔딩입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2023년도 달력도 마지막 한 장 남겨 놓았습니다. 미국의 어떤 광고 영상에 보면, 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그네에 태워 밀어주고 있습니다. 아들이 그네를 타고 앞으로 밀려 나갔다가 다시 뒤로 왔을 때는 80킬로그램 나가는 덩치 큰 소년으로 돌아왔고, 그네에 치여 아버지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삶은 매우 빠르게 흘러갑니다’라는 자막이 나옵니다. 자녀들 커가는 것을 보면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한 해의 마지막이 있듯이, 인생도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 마지막을 준비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고통도 불행도 생기지 않는 것처럼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병든 자여 다 이리로 오라’ ‘불행한 자여 다 이리로 오라’ 외칩니다. 예수 믿으면 병도 낫고 불행한 일을 만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질병과 사고는 사람 가리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고통이 있고 불행한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반대로 어떤 분들은 기복신앙을 질타하며 고난의 길을 자처하며 걸어갈 것을 촉구합니다. 어느 한쪽이 정답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믿음의 결국은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는 희노애락이 다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을 소개하며 “믿음은 바라보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에,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믿음은 멀리 보는 것이며, 해피엔딩이라는 뜻입니다. 살면서 선한 일을 하다가 오해받고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며 전도하다가 고발당합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며 발에는 쇠고랑을 차게 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깊은 절망과 낙심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바울의 처지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깜깜한 터널이라도 끝에 이르면 밝은 빛으로 나오게 됩니다. 감옥에 있는 그 순간만큼은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 감옥 속에서 간수장과 여러 사람을 살렸습니다. 고통의 시간에 값진 의미가 부여되고, 해피엔딩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을 행하다 낙담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고난을 많이 겪었던 욥도 고난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안이숙 여사의 책 ‘죽으면 죽으리라’를 보면, 일본 제국과 맞서 싸우다가 형무소에 구속되고 모진 추위와 고문에도 기도와 찬송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1945년 사형집행을 몇 시간 앞두고 8.15광복을 맞아 기적같이 출옥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가 교육과 음악을 전공한 뒤 책을 집필하고 집회를 다녔습니다. 아시다시피 욥도 이전보다 더 풍성한 은혜로 회복되었습니다. 믿음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입니다. 인생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해가 저물기 전에, 주 예수를 믿는 바른 믿음을 점검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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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3
  • 목회단상 > 어린 소녀의 감사
        오늘은 ‘새생명 축제’가 있는 주일입니다. 누군가의 초대로 어렵사리 교회로 발걸음을 향하신 분들을 환영합니다. 새로운 만남은 언제나 가슴 설레게 합니다. 모든 교우들이 사랑으로 기다려 왔습니다. 여기저기에서 꽃장식도 하고, 풍선도 붙이고, 음식도 만들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초대되신 분들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저도 매주 주보에 싣는 ‘목회단상’ 코너에, 어떤 글로 환영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마침 교육부서에서 카톡으로 보내온 어린 학생이 쓴 자작시를 보았습니다. 저의 글쓰기를 포기하고 ‘어린 소녀의 감사시’를 소개하고 싶어서 옮깁니다. 소녀가 초등5학년 때에 자작한 시인데, 당시 엄마의 암수술로 가족이 힘든 시기였다고 하네요.  <어린 소녀의 감사> 타인의 불행이 내게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는게 감사라면 나의 감사는 타인의 아픔에 대한 조롱일 뿐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감사는 아닙니다 나의 감사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감사를 드리려 합니다. 세상에 가난과 전쟁과 불의가 가득함에 감사합니다.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우리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정의를 기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이 부자가 아닌 것에 감사합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의 물질에 의지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이 강남의 타워펠리스가 아닌것에 감사합니다.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을 찾아 오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빠가 권력자가 아닌것에 감사합니다. 아빠의 권력이 소망이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만 소망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엄마가 아프셔서 내가 많은 눈물을 흘렸던 것에 감사합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우리 가족은 서로를 더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 삼남매 중에 태어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사랑하고 양보하는 하나님의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교 1등을 하는 지식의 사람이 아닌것에 감사합니다. 세상의 지식으로 교만하지 않고 지혜의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닌 것에 감사합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나의 찬양의 대상이며 나의 서투른 선율을 하나님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족한 내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자랑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3-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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