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30(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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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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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3

실시간 목회단상 기사

  • 적(敵)은 안에도 있다
    2015년 3월 24일 스페인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독일 뒤셀도르프 국제공항으로 가던 저먼윙스 독일 여객기가 프랑스 남부 알프스 산맥에 추락하면서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사고 원인을 조사한 결과 부기장이 일부러 알프스 산에 충돌시킨 자살비행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당시 사고 여객기의 부기장은 기장이 화장실에 간 틈을 타 조종실 문을 안에서 잠갔습니다. 그가 여객기를 알프스에 충돌시키기 위해 비행했던 8분 동안 아무도 조종실 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9.11테러 이후 전 세계 항공사들이 여객기 납치 예방을 위해 조종실 문을 안에서 잠그면 밖에서는 절대로 열지 못하는 장치를 해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9.11테러 이후 항공업계는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했지만 ‘내부의 적’을 막는 방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은 ‘적은 안에도 있다’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조정은 일본을 살피기 위해 황윤길과 김성일을 파견했습니다. 일본을 탐색하고 돌아온 황윤길은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라고 보고했고, 김성일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평화를 좋아했던 조정에서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보고를 채택했습니다. 듣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조선은 전쟁을 대비하지 못하고 임진왜란으로 7년간 국토가 황폐해졌고, 수많은 부녀자가 왜군에게 유린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적은 밖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선조를 이은 광해군은 막강한 세력으로 부상하는 청(淸:후금)과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은 명나라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며 능양군(인조)를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분노한 청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는데 그게 병자호란입니다. 신하들은 인조를 모시고 황급히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지만, 인조는 청 태종 앞에 삼궤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것)로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적은 외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었습니다.  36년간 일제의 속국이 되는 한일합병도, 수많은 죽음과 전쟁 고아를 만들어낸 6.25 전쟁도 적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백제의 멸망은 의자왕과 자식들 간의 분열에 있었고, 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 아들 간의 분열에 있었습니다. 모두가 다 내부의 적 때문에 나라가 망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신앙도 망하게 하는 적은 우리 내부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새사람이라도, 여전히 범죄한 아담의 본성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옛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망하게 하는 적은 이 옛사람입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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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30
  • 감사 주일의 단상
    이번 추수 감사 주일에는 감사를 글이나 그림처럼 자신이 가진 여러 가지 재능으로 표현해 보자고 광고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작품들을 보았습니다. 지구상에 하나뿐인 작품들이어서 우열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글자 수를 고려해서 그중에 하나를 소개합니다. 순례자의 여정과 고백 ○○○ 권사 알람 소리에 새벽 단잠이 깼습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새벽을 어둠의 한 발악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제일 먼저 성경을 몇 장 읽고 나서 어둠 속에서 교회로 향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마음을 쏟아내고 교회를 나서면 어느새 어둠은 물러가고 하늘에는 별 대신 솟아난 동녘 해와 탁 트인 쾌청한 하늘이 보입니다. 상쾌한 공기 속에서 조용한 거리를 걸으며 하루 일과를 되뇌어 봅니다. 보람찬 하루도 있지만, 그저 그냥 지나간다고 할까. 정말 멋이 없는 하루를 보낼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많은 기도와 감사, 이것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많은 은혜요, 내 마음의 고백이요, 내 입의 노래입니다. 하루의 마지막은 꼭 성경을 몇 장 읽고 시편 23편 말씀을 암송합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 나는 당신의 양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시편 127:2).” 이 말씀을 계속 되뇌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든답니다. 이렇게 해서 저의 하루는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젊을 때는 이 연결을 잘 몰랐지만, 이제 나이 연한이 기울다 보니 하나님과 나와의 이 연결이 참으로 좋습니다. 연로하신 권사님께서 평범한 일상을 덤덤히 표현하신 글입니다. 이 글뿐만 아니라, 작품 하나, 하나를 보면서 참 감사했습니다. 김현승 시인의 <감사하는 마음>이란 시의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감사하는 마음 ― 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 주인(主人)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아는 마음입니다. 사람에 대한 감사도 상대방을 아는 마음, 곧 그를 이해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으며 아침까지 새벽기도를 하시고 걸어가시는 권사님의 뒷모습과 그 일상이 그대로 그려집니다. 권사님을 알기 때문이지요. 마지막 줄 “연한이 기울다 보니 하나님과 나와의 이 연결이 참으로 좋습니다” 이 부분이 와 닿습니다. 제가 작품을 내신 분들을 알고 이해하고 읽기에 더욱 감사가 깊어집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자연이 눈에 들어와서 깊은 감동을 하고 감탄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뒷동산을 산책하다가 겹겹이 쌓인 낙엽을 밟는 소리와 깊게 물든 나무들을 보면서 감탄합니다. 권사님의 연세에 비할 바 못 되지만 나이 때문인 듯 합니다. 어찌 되었건 감동, 감탄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 같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동받고 감탄하며 감사하는 것이 나이 때문이라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두근대면 무죄! 설레지 않으면 유죄!”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도 이 말을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일상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또 목회자로서 교우들과의 만남에도 적용해 볼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예배를 통하여, 이 일을 통하여, 이 만남을 통하여 어떤 선물을 예비하고 계실까! 두근대면 무죄! 아무런 기대도 감사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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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 비판보다 어려운 것
    많은 분들이 정의로운 비판을 하면 자신이 정의로운 사람이 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저도 젊은 시절, 냉철한 지성을 자랑하며 투사처럼 판단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철들면서 비판하는 것이 제일 쉽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비판이 옳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비틀거리는 사람을 비난하지만, 그가 구타당한 모습은 보지 못합니다.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사람의 속사정을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린 볼 수 있는 것들의 한계를 인정하는 자세로 사람을 상대해야 합니다. 누구도 쉽게 정죄해서는 안 되고 보이는 대로 판단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순간적으로 판단하려 합니다. 그 사람의 속사정에는 관심이 없고, 보이는 것만으로 비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보이는 것 하나만 가지고 곧바로 감정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선동 선전, 사기, 이간질에도 쉽게 넘어갑니다. 좀 더 볼 수 있을 때까지 잠깐 판단을 멈추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마7:1)”라고 하셨습니다. 비판하는 자는 같은 내용으로 비판받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유명인 중에 과거에 자신이 한 비판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돌아와 곤혹을 치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좋은 말, 의로운 말만 골라서 해야만 하는 목사로서 가슴이 뜨끔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경우에도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떻게 사회가 비판 없이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공동체나 정당한 비판이 없다면 잘못에 대하여 책임질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실패한 지도자나 정책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역사는 퇴보하며 나라는 발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민주적 방식의 선거제도는 정당한 비판을 통하여 잘못된 지도자는 퇴출하고 잘하는 지도자는 더욱 잘하도록 기능합니다. 또한 자기 말과 행동에 책임지는 자세를 가지게 합니다. 이렇게 정당한 비판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개인적으로도, 우린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을 판단하게 됩니다. 비판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리해 봅니다. 첫째, 상대방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며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둘째, 자신이 비판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인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지적하는 것은 경우에 맞지 않습니다.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셋째, 사랑이 없는 비판은 유익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비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면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책망은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다. 때리는 어머니도 맞는 아들도 함께 눈물 흘리며 끌어안을 수 있는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내게 사랑이 없다면 함부로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판단을 맡길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비판은 쉽습니다. 비판보다 어려운 것은 사랑으로 감싸고 안아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공동체 안에서 연습하고 길러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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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12
  • 성경에서 금을 캐어냅시다.
    성경은 지금부터 대략 3500년 전부터 2,000여 년 전까지 약 1500년 동안 기록되었습니다.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물론이고, 내용과 보존 형태만 놓고 보아도 여느 책과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책입니다. 성경만큼 오래되었으며,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과거나 현재나 한결같이 읽히고 있는 책은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단순히 유익한 고전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진리입니다. 성경 속에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으며, 인생을 사는 지혜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인생의 보물을 캐어내어야 합니다. 성경은 지혜의 책입니다. 욥기의 말씀에 보면, 사람이 지혜를 찾아가는 과정을 금을 캐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욥 28:1-2). 본래 금은 땅에서 캐낼 때 돌과 같은 불순물하고 섞여 있습니다. 제련 과정을 거쳐서 불순물을 걸러내야 순도 높은 금이 나옵니다. 이같이 성경도 금의 원석과 같습니다. 그 속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나오고, 인간의 말도 나오고 때로는 사탄의 말도 나옵니다. 성경에는 의인의 행적도 있지만, 악인들의 행적도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같이 훌륭한 신앙의 위인들도 있지만 애굽의 바로와 같은 사람도 있고, 가롯 유다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 읽는 분들은 성경 한 페이지마다 쉼표도 없이 빼곡하게 기록된 글을 보면, 읽기도 전에 어렵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실제로 쉬운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책이요 지혜의 책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혜가 여기 있다.’라고 믿어야 합니다. 설령 내 생각과 다른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이 금과 같이 소중하고 귀하다면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을 최종 최고의 권위로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성경 속에서 금을 캐어낼 수 있습니다. 요즘 유튜브가 유행이지요. 유튜브 영상 중 성경에서 금을 캐어낼 수 있도록 가이드를 잘해 주는 채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유튜브는 성경에 대해서 안 좋은 얘기, 설명하기 난처한 얘기들만 조목조목 고르고 뽑아내서 그럴듯하게 설명합니다. 겉으로는 성경 이야기를 하는 듯했지만 실은 성경을 깎아내리고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도록 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똑같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돌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금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구원의 책으로 읽습니다. 인생을 사는 지혜가 성경 속에 있음을 믿고 읽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전혀 생각지 못한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너무 기분이 좋아서 하늘을 붕붕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것 같습니다. 너무 좋아서 혼자 손뼉을 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마치 황홀하고 멋진 꿈을 꾼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금을 캐는 사람에게는 이런 은혜가 있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성경을 읽도록 합시다. 믿음으로 성경을 읽는 여러분 모두가 금을 캐는 사람들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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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9-28
  • 목회단상> 뽑고 심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
    한 청년이 수도사의 길을 걷기 위해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장은 그에게 권총 한 자루를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 생활이 답답하면 공중을 향해 한 방씩 쏘면서 마음을 푸십시오.” 그는 답답해질 때마다 수도원 뒷산으로 올라가 권총을 쏘면서 마음을 달랬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권총으로도 답답함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견디다 못해 수도원장실로 갔지만 원장은 없었습니다. “원장님이 어디 계실까요?” “아마 뒷산 너머에 계실 겁니다.” 뒷산 너머로 수도원장을 찾아간 그는 기절할 뻔했습니다. “따다다다따다다….” 하늘을 향해 기관총을 쏘고 있는 수도원장을 봤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 국내외 정세, 물가상승과 고금리, 환율상승 등에 따른 답답하고 염려스러운 마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이 필요합니다. 평안한 마음을 위한 조언은 많습니다. ‘좋았던 일들을 기억하라’ ‘긍정적으로 말하라’ ‘봉사하라’ ‘바쁘게 살라’ 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잠시 잠깐의 감정 진통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마음 속의 답답한 감정, 불안한 감정, 염려와 두려움의 감정, 분노의 감정 등이 뽑힙니다. 대신 평안함과 담대함이 마음에 심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 안에서 뽑고 심는 일을 합니다. “나의 말씀을 네 안에 두라. 그러면 그 말씀이 파괴하고 뽑고 심고 건설할 것이다” (렘1:10). 종종 뉴스에서 검거된 흉악범 사이코패스의 얼굴을 공개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이 전혀 흉악범처럼 보이지 않고 너무나 평범할 때, 우리는 놀랍니다. 어떤 범죄심리학자는 사이코패스를 ‘정장 차림의 뱀’으로 비유했습니다. 세상에는 정장 차림의 뱀이 많습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정장 차림과 같은 외모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도 뱀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외모에만 관심을 두기보다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운전자가 누군가에 따라서 인생은 달라집니다. 술을 마신 사람이 운전대를 잡으면 아무리 좋은 차라도 비틀거리고 사고를 내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려지면 뱀과 같이 인생을 망치는 나쁜 성품, 나쁜 습관, 나쁜 감정 등이 뽑힙니다. 대신 말씀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 되어 안내합니다. 우리 교회는 전교인이 성경통독 200독을 목표로 하여 읽고 있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더욱 깊게, 그리고 많이 읽으시길 바랍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읽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뽑을 것은 뽑고, 심을 것은 심어서, 마음의 평안을 누리시고,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을 가꾸어 가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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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9-21
  • 인생은 스토리다.
    크레이그 바르톨로뮤와 아이클 고힌이 함께 기록한 <세계관은 이야기이다> <성경은 드라마다> 라는 두 권의 책이 있습니다. 제목만 보면 드라마처럼 쉽고 재미있을 것 같지만, 철학으로 분류되는 세계관 서적이라서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책의 제목이 그 내용을 한 문장으로 쉽고 명쾌하게 요약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성경은 암호 코드로 된 책이 아니라, 메타 네러티브(=큰 이야기)로서 분명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세상과 인류의 기원과 끝, 그리고 끝 너머의 영원을 담은 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스토리의 작가이면서 연출가입니다. 성경 스토리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 스토리는 개인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큰 이야기입니다. 삶의 이야기이기에 공감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내 삶의 이야기, 곧 나의 과거, 현재, 미래, 나의 꿈, 내가 가야 할 길... 나의 스토리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지난 금요기도회 시간에 80년대를 풍미했던 포크송 그룹 해바라기의 멤버였던 분을 모시고 <미션 해바라기> 집회를 했습니다. 1부에는 히트곡을 불렀고, 2부에는 찬양 간증을 했습니다. 예배당에서 가요를 불러도 되나?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찬양과 간증은 삶 속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일(그 스토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의 삶의 스토리에서 노래는 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분들만의 독특한 하나님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동시에 그 스토리는 성경이 말씀하고 계시는 ‘구원’이라고 하는 보다 큰 이야기, 메타 네러티브의 한 부분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가수 김종찬 씨의 ‘토요일은 밤이 좋아’는 제 세대의 토요일 밤을 불태우는(?) 기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스토리도 없이 특송으로 ‘토요일은 밤이 좋아’를 부른다면 누가 받아줄까요. 그러나 이 노래가 김종찬 목사님의 간증 속의 한 부분이 된다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공감, 그것은 스토리의 힘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편 18:1-2) 유명한 성경 구절입니다. 이 시편을 노랫말로 우린 찬양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 시편의 제목을 보면,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 여호와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도 사울의 손에서 건져 주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뢰어 이르되〕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노래는 그냥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다윗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게 된 다윗의 스토리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힘이 됩니다. 그게 스토리의 힘입니다. 누구나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오늘 힘든 일이 있습니까? 가슴에 멍이 들고,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까? 나이가 들고, 몸도 마음도 쇠약하여 가는데, 내 인생은 그리다 만 그림같이 초라하다고 생각되십니까?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십시오. 더욱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 고난도 눈물도 나만의 스토리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스토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작은 몸짓 하나, 흘린 눈물 한 방울까지도 헛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스토리의 결론을 내시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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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
    마음이 답답하여 가평에 있는 필그림 수양관에서 하루를 머물다 왔습니다. 단 하루이지만 꿀 같은 안식의 시간이었습니다. 산속 공기가 좋았고, 천로역정 코스로 꾸며 놓은 산책로도 흥미로웠습니다. 오랜만에 주님만 바라보고 명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침묵 기도를 하는 곳이어서 잠시 졸음과 싸우느라 힘들었지만, 고요한 중에 주님을 대하는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고요하다가 한 번씩 강하게 임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참 행복했습니다. 무언가를 달라며 졸라댄 것도 아닙니다. 거저 주님 바라보며 앉아 있을 뿐이었는데 주님은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며 선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동화책같이 권선징악이 뚜렷하지도 않고, 내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때론 주님이 내가 원치 않는 상황으로 이끌어 가실 때도 있습니다. 마음이 아프고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는 답답합니다. 그래도 주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신뢰함으로, 더욱 주님 손 꼭 붙잡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설탕이나 버터는 달기는 하지만 건강에 썩 좋지 않습니다. 소금은 짜서 싫습니다. 베이킹파우더도 그냥 먹기 힘듭니다. 밀가루는 호불호가 갈립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합쳐서 구웠더니 맛있는 과자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이렇게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하나 보면 거친 것입니다. 호불호가 갈립니다. 그러나 모두 합치면 과자가 됩니다. 낱개로 보면 싫은 것도 하나님이 합력하시면 유익한 것이 됩니다. 고난은 쉽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난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큽니다. 그리고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이것을 믿는 신앙을 ‘섭리 신앙’이라고 합니다. 섭리 신앙으로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까지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능력’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에펠탑을 건립할 당시, 파리의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모파상을 비롯한 많은 지성인이 무척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탑이 완공된 후 모파상은 매일 에펠탑 카페에 올라가 차를 마시고 글을 썼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그렇게 이 탑의 건립을 반대하고 싫어하던 당신이 어떻게 이 탑을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모파상은 "탑에 들어와 앉아 있으면 이 탑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세상에는 모순된 일들이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비판과 반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정당한 절차를 거쳐 일의 방향이 결정되면 비판 대신 협력을 통한 상생의 기쁨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공동체는 성숙과 발전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교회의 일도, 국가의 일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으로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이 나라도 보다 성숙해졌으면 좋겠습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08-24
  • 하계 부흥회를 앞두고
    2020년 2월 입당 예배 이후에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세상은 급속히 변했습니다. 행복한 변화가 아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교회에 불어닥친 변화의 현실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영역인 예배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교회의 정의는 ‘에클레시아’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예배도 모임이고, 모여야 일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이기를 더욱 힘써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언택트 시대, 모이는 것을 미덕이 아니라, 민폐로 여깁니다.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모이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포기할 수는 없으니, 온라인 예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신학적 정당성에 대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미 온라인 예배와 모임 등은 포기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사회는 오랫동안 축적되어온 기술로 언택트 상황을 빠르게 수용하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를 수용할 준비가 되지 않은 교회들은 그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인의 수가 감소하고, 일부는 문을 닫았습니다. 아직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조금만 견디자’ 하는 교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시간아, 흘러라. 조금만 견디자’ 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을 가장 유익하고 행복한 시간으로 활용했습니다. 예배는 현장과 온라인 양쪽 모두 은혜가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멘토링 양육, 제자훈련 등을 통하여 신앙을 내면화하며, 리더를 세우고 공동체의 성숙과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교인 숫자도 급속히 늘고 있습니다. 팬데믹 시대에 우리처럼 성장하는 교회는 드물 것 같습니다. 제자훈련 시간에 성도님들께서 바쁘게 달려온 저에게 안식년을 제안하였습니다. 참 감사하고, 뭉클했습니다. 그 따뜻한 배려는 이미 저의 마음에 안식과 재충전을 주었습니다. 가속을 받아서 달려야 하는 시기에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습니다. 대신 착한 양 떼를 위해서 아프지 않고 더욱 잘해야지 다짐해 봅니다. 교회도 이 시점에서 본질을 점검하고 다시 시동을 걸어야 할 때입니다. 하계 부흥회 주제가 “리부트하라!”입니다. 리부트(Reboot)란 본질을 잃지 않은 상태에서 새롭게 하는 시작을 말합니다. 재부팅을 위해 먼저 on을 off 상태로 만들어야 합니다. 3일간 개인적인 시간을 off 합시다. 약속은 뒤로 미루고 예배에 참여합시다. 그것이 리부트를 위한 off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결단이 필요합니다. 복음 리부트 (강사: 김용의 선교사, 8/10 수, 저녁 7시 30분) 교회 리부트 (강사: 박건 목사, 8/11 목, 저녁 7시 30분) 기도 리부트 (강사: 이강목 목사, 8/12 금, 저녁 7시 30분) 참여한 모든 분의 삶에 하나님의 행하시는 은혜로운 일들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부흥하는 우리 교회가 더욱 은혜로운 사역을 열어가는 새로운 시작이 될 것입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08-10
  • 고통과 탄식이 가득한 현실 앞에서
    어느 초등학생이 쓴 시라고 합니다. 제목 <개 팔자 상팔자>, “개 팔자 상팔자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가만히 있어도 때가 되면 밥을 주고/똥 싸면 똥도 치워주고/산책도 시켜 주고/자기 마음대로 낮잠도 자고/무엇보다 숙제를 안 해도 된다/다음 생에는 좋은 주인 만나/개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린아이가 무엇이 그렇게 힘들어서 개 팔자가 다 부러웠을까요. 아이들이 그렇다면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 시대를 사는 성인들은 얼마나 힘들고 버겁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찬송가 515장의 가사가 생각납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고.” 세상이 점점 발전되고 있다고 하지만 인류는 오히려 세상을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정신적인 혼란, 극한 피로, 생존을 위한 전쟁과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수많은 영상매체와 온라인을 통해 파고드는 불필요하고 거짓된 정보의 홍수는 영적인 영역까지 침몰시키려 합니다. 인생이 전쟁이 되고 고통이 되는 데는 많은 원인이 있을 겁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행복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삶에서 밀어내고 나면, 결국 자신이 주인 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를 위하고, 자신의 만족과 욕심을 채우며 살기에 급급합니다. 어떻게든 내가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내가 가지려 하고, 내가 좌지우지하려 합니다. 거기서 모든 문제와 다툼, 불행이 시작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고, 쉼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하나님은 우리가 만나는 모든 현실 속에서 함께 하십니다. 나의 열심과 최선을 수단으로 삼고 선을 이루십니다. 때로는 그런 수단 없이도 우연을 가장하여 선을 이루기도 하시며, 그런 수단을 초월하는 기적으로 선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나의 실수와 악하고 불의한 일들을 거슬러 선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아무리 답답하고 힘든 중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 말씀에서 답을 찾는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를 향한 놀라운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07-27
  • 목회단상 > 믿음의 사람이여 희망을 품어라!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밝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이상주의자, 낭만주의자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 바라보고 땀 흘리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현실주의자라고 합니다. 현실의 높은 벽에 절망하며, 세상이 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조차 의심하고 게을리하는 사람을 회의주의자, 허무주의자, 염세주의자라고 합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많이 경험할수록 이런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세계는 한때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신봉하며 머잖아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1, 2차 세계 대전과 경제 대공황을 겪으면서 그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러면서 회의주의자, 허무주의자들이 많아졌습니다. 20세기 후반 경제발전과 세계화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 인간의 교만은 머리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 사상적 배후에는 포스터 모던이라는 사조가 있는데, 이 사조의 뿌리는 철저한 인본주의입니다. 절대 진리, 절대자, 절대 규범 이런 것을 부정하며,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자유 인권의 미명하에 권위와 규범을 해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인류의 교만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다시 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보려고 하는 열심조차도 소용없는 오늘, 팬데믹 시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다시 회의주의, 허무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이런 부정적인 현상에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속속 포기하고 있습니다.   옛날 6.25 전쟁의 폐허 더미 속에서도, 사람들은 천막 교회에 나아와서 기도하며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그 어려운 시절을 극복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었고, 신앙은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그러나 2022년의 세상은 교회를 희망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향한 온갖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전과 같이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조심스럽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상황은 6.25 전쟁 이후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어버렸던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도 절망하고 포기해야 합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성경에는 언제나 희망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 곧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린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믿고, 그가 상 주심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희망 가득한 꿈을 그리고 기도하며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희망이 이 땅의 모든 성도의 얼굴과 삶의 태도로 나타난다면 교회는 다시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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