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2-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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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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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7-13

실시간 목회단상 기사

  • 목회단상> 누가 큰 자인가?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큰 자인가?’ 하는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는 섬기는 자요, 으뜸된 자는 종이 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힘을 가지고 큰 자로 대우합니다. 그래서 모두들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남을 낮추고 자신을 높이려 하다 보니 서로 다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천국에서 큰 자는 섬기는 자, 스스로 종이 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살 동안 섬기는 것만큼 하나님 나라에서 실력이 되고, 종이 된 것만큼 높아진다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천국의 가치는 섬기는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는 어떤 자일까요? 섬기는 실력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남에게 섬김만 받고 온 사람이 제일 작은 사람입니다. 교회 안의 직분은 계급이 아닙니다. 제직 임명을 받으면 그것만큼 더 많이 봉사하고 섬기라고 주어진 섬김의 직분입니다. 직분을 받아서 그 직분으로 인하여 많이 섬겼다면 주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는 인격과 실력을 만들었기에 그 직분이 복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직분을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스스로 종이 되어 섬겼느냐에 따라서 주님 나라에서 그 사람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렿게 본다면, 주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예, 당연히 우리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오고 오는 모든 시대, 모든 민족을 섬기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주님은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시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제자 된 우리들도 주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나라의 가치는 섬김의 가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교회에서든지, 가정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이 사람을 만나든지 저 사람을 만나든지 섬기는 일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여 돈을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돈 가지고 뭐 할 것이냐?’ 물으십니다. 그럴 때 거짓됨이 없이 진정으로 ‘예, 주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일에 쓰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주님은 아낌없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사를 받았든지, 어떤 것을 받았든지,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할 일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두신 ‘남은 봉사, 남은 종노릇’ 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는 말씀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섬기는 자는 어디를 가든지 필요한 자가 되고 환영받는 가치 있는 자가 됩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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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5-02-12
  • 목회단상> 가장 행복한 사람이 돠려면
    한 소녀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바둥바둥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가시덤불을 헤치며 들어가 나비를 구해줬습니다. 소녀의 팔과 다리는 가시에 찔려 붉은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나비가 순식간에 천사로 변하더니 소녀에게 다가왔습니다. 천사는 자기를 구해준 은혜에 감사하면서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그때 천사가 소녀의 귀에 소곤대더니 사라졌습니다. 소녀는 자라면서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임종을 눈앞에 뒀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어떻게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지” 비결을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웃으며 앞선 일을 들려줬습니다. “나비 천사가 다가오더니 이렇게 속삭이는 거야. ‘구해줘서 고마워요. 소원을 들어드릴게요. 범사에 감사하다고 말하면 평생 행복하게 될 거예요.’ 그때부터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다고 말했더니 정말 평생 행복했던 거야. 사실 천사가 내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니야. 누구든지 만족할 줄 알고 매사에 감사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이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할머니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이 가득했습니다. 행복의 비밀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출애굽을 위하여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갑니다. 가나안을 가지 위해서는 긴 광야의 여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광야로 들어 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기저기에서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은 늘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면 좋은 미래가 열립니다. 비록 광야에 서 있지만, 입술에 가나안의 소망과 감사가 있으면 가나안으로 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한 이유가 어이가 없습니다. 두 달 반 동안 고기와 떡을 못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애굽에서 종으로 있을 때는 떡과 고기가 있었는데 종에서 벗어나니 이제 떡도 없고 고기도 없다. 차라리 우리가 거기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이리로 데리고 왔느냐’고 불평합니다. 이들은 배만 부르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기에 최고의 순간, 최고의 방법으로 최고의 것을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참고,마6:31~32).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때 그 감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으로 다시 향합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복을 끌어옵니다. 2025년도는 더 많이 감사함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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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5-01-22
  • 목회단상> ‘리:본’ 본질 위에 새로움을 더하다
    희망으로 가득한 새해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15년 만에 상가 건물에서 벗어나 이곳에 교회를 건축하고 2020년도 송구영신 예배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그날의 감격이 채가시지 않았지만, 벌써 5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3년간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팬데믹 기간 부흥하는 몇 안 되는 교회 중에 하나로 우리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단순히 교인 숫자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새가족반·멘토링 양육·제자훈련 등으로 마음을 나누는 동역자들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사랑방 리더, 멘토, 교사, 사역자들은 제가 어디에 가도 자랑하고 싶은 소중한 분들입니다. 예배는 감격과 은혜로 드려졌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행복한 공동체였습니다. 처음 교회 오시는 분들은 하나 같이 교회의 분위기가 밝고 친절해서 좋았다고 합니다. 외부에서 초대한 강사님들이나 손님들도 이구동성으로 은혜로운 분위기를 칭찬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가 좁다며 곧 넓은 곳(?)으로 가야 할 것 같다는 말들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와 붙어있는 큰 땅에 교회가 다시 세워질 것이라고 예언 같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일하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에벤에셀의 기념비라도 세우고 싶습니다. 모두 열심히 달렸고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익숙하게 해오던 것들이 이제 낡은 옷이 되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장윤석 목사라는 인물도 식상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어쩔까? 지난해 11월 목회 구상을 위하여 조용히 기도굴에서 기도하며 떠오른 단어가 ‘갱신’입니다. ‘그렇다. 안주하지 말자. 멈추면 그 자리가 아니라, 쓰러진다.’ 기도원에서 ‘갱신’이란 단어 하나 붙잡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모순이 있습니다. 단어가 가진 의미와 달리 ‘갱신’ 촌스럽지 않나요? 그래서 조금 더 세련되게, ’리:본 본질 위에 새로움을 더하다’ 이렇게 2025년 교회 표어를 정했습니다. 리:본, 풀이하면, ①다시 본질로, ②본질 위에 새로움을 더하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복음’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서, 낡은 것은 갱신 = 새 옷 입도록 해야 합니다. 예배도, 사역도, 목사도, 새 옷을 입고, 새 부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마다, 새 은혜, 새 노래,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길 사모합니다. 새 옷을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게을러서도 안되고, 귀찮아해서도 안 됩니다.    예전에 삼성의 이건희 씨가 “시대에 발맞추어, 다 바꿔봐라. 마누라하고 자식 빼고...” 바꿀 수 없는 이것은 본질입니다. 그렇게 갱신, 혁신을 외치며 삼성이 20년 이상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갱신하지 않으니까, 애플을 넘지 못하고, 대만 중국에도 밀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도 만년 2위였던 SK 반도체에 1위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거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말라.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라” 말씀하셨습니다. 2025년도 우리 교회와 개인의 신앙이 “리:본”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하늘사랑의교회 장윤석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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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5-01-08
  • 목회단상> 최선을 다한 모습은 감동을 준다
    장윤석 목사 <하늘사랑의 교회>     부모는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쓰려져 곤히 잠든 아이를 아침 일찍 깨울 때면 안쓰럽습니다. ‘10분만 더 자게 두자’라며, 혹시라도 깰까 발자국 소리도 조심합니다. 이처럼 시험을 앞두고 정상적인 학생은 힘을 다 쏟아 공부합니다. 시험을 다 치른 후에는 곯아 떨어져서 밀린 잠을 실컷 자봅니다. 어떤 학생은 시험을 친 후에도 힘이 남아돌아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별로 피곤한 것도 없습니다. 힘을 다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축구 경기를 보면서 종종 침대 축구라는 것을 봅니다. 1골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무승부를 만들기 위해서 넘어져서 시간만 끄는 경기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경기가 종료되면 이겼다고 운동장을 뛰어다닙니다. 꼴불견입니다. 그 힘으로 경기 중에 한 골 더 넣으려고 뛰었다면 지더라도 격려를 받을 것입니다. 저는 2002년 월드컵을 잊을 수 없습니다. 4강까지 가면서 부상으로 피가 나는 머리를 붕대로 감고 뛰던 선수들의 투혼은 감동이었습니다. 힘을 다하는 모습은 감동을 줍니다. 몇 년 전 박항서 감독이 이끌던 베트남 축구팀이 아시아권 대회에서 이변을 일으킬 때도 그랬습니다. 중국의 텅 빈 경기장에서 난생 처음 보는 눈을 맞으며 어린 선수들이 눈밭에서 투혼을 불태웠습니다. 그 모습은 축구에 관심도 없던 베트남을 열광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최선을 다한 모습은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방황을 하다가 늦게 정신 차리고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하루 24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어서 하루 16시간 이상 공부를 한 적 있습니다. 어느 날 공부하는데 갑자기 앞이 하나도 안 보였습니다. 눈을 비비고 깜빡거려도 탁한 물속에 들어온 것과 같았습니다. 다행히 1시간 정도 지난 후 회복이 되었습니다. 앉았다가 일어서면 빈혈이 와서 벽을 붙잡고 한참 있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돌아보니 제 삶 가운데 그렇게 최선을 다한 적이 있을까 싶습니다. 지금도 목회를 하면서 ‘죽도록 충성하자. 닳아서 없어지자’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순교하기 직전 로마의 옥중에 있었을 때에 기록한 서신입니다. 임박한 죽음을 직감하고 전력투구했던 지나간 날들을 회고하며, 후회 없는 삶에 대한 확신과 만족감을 표현합니다. 마치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처럼... 힘을 다해 살아온 사도는 디모데후서 4장 7절에서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노라” 고백합니다. 이 말씀은 읽을 때마다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줍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하고 주님 앞에 서는 그날 남아 있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물질 육체 재능 등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써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빈털터리가 돼야 합니다. 무엇인가 남기고 죽는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주님 앞에 쓰러진다면 주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워 줄 것입니다. 그리고 안아 주시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의 수고를 안다”라는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 한마디면 족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매우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힘을 다하여 충성하여 영원히 후회 없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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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12-04
  • 목회단상>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장윤석 목사> 하늘사랑의 교회     열왕기상 3장을 보면, 솔로몬의 명판결이 나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3일 간격으로 출산한 두 창녀가 있었는데, 한 여자가 잠을 자다가 자신의 아기를 깔아뭉개 질식사하게 한 후에, 비슷하게 출산한 다른 창기의 아이를 보고는 바꿔치기하여 자신의 아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목격자도 없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아이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기에 이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솔로몬은 그 살아 있는 아이를 칼로 반씩 잘라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어미들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때 죽은 아이의 어미는 똑같이 잘라 달라고 하고, 아이의 친어미는 제발 죽이지 말고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라고 사정합니다. 그 모습을 본 솔로몬은 죽이라는 여인은 가짜 어미이고, 살려 달라는 어미는 진짜 어미라는 최종 판결을 내립니다. 요즘 같으면 DNA 검사하면 간단한 일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솔로몬의 지혜에 탄복하였습니다. 죽은 아이의 어미는 꼭 마귀 같습니다. 제 자식을 부주의하여 죽이고, 뻔뻔하게 살아 있는 아이를 제 아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심지어는 제 자식이라고 했던 아이를 죽이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의 아비, 마귀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아이의 어미는 아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포기합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억울해도 포기합니다. 여기서 포기할 경우 자신에게 닥칠 일을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의 소송비용을 다 물어야 할 뿐만 아니라 아기를 죽인 살인자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사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기꺼이 이 길을 선택합니다. 이 어미는 자신이 죽고 아기를 살리는 어미입니다. 꼭 예수님 같습니다. 예수님도 모든 것을 다 포기하시고 자신의 생명까지 십자가에서 주심은 우릴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우린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두 사람이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는 살리는 어미요, 또 하나는 죽이는 어미입니다. 살리는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구원과 믿음을 위하여 포기와 희생도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죽이는 목사는 자기 욕심을 위하여 교회가 찢어져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죽이는 정치인은 자기 욕심을 위하여 나라가 찢어져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공동체에 생명의 에너지를 불어넣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강하게 주장하거나 붙잡고 있는 것을 포기할 수 있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우리 안에 죽이는 사람과 살리는 사람이 공존합니다. 살리는 사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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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10-23
  • 목회단상> 무엇을 위해 사나요?
       장윤석 목사 <하늘사랑의 교회>     사람은 동물과 달라서 먹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지적인 욕구가 채워진다고 만족하는 것도 아닙니다. 파스칼은 “사람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공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즉,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가 있으며, 하나님으로만 그 허기가 채워지고 만족되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지요. 혹시 “내가 사는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세상에는 생존을 위해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 이렇게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에 생존을 위해 산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있습니다. 롯은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지 않고 당장 눈앞의 비옥한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생존에 이익이 되는 길을 선택을 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소돔성에서 집도 얻고, 인정도 받고 잘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하는 아픔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시편 1편 말씀에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생존을 위해 사는 삶은 당장은 얻는 것 같지만 결국은 다 잃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잊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복음을 위해 산 사람들도 많습니다. 롯의 삼촌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좋은 입지 조건을 가진 땅은 양보했지만, 하나님의 약속만은 놓치지 않고 붙잡았습니다. 그 약속은 땅과 후손과 약속의 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습니다.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보다 약속을 더 신뢰했습니다. 이삭은 자신의 전부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이삭을 드림은 자신의 전부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결과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 씨에서 그리스도가 나셨습니다. 다윗도 골리앗과의 승부에서 칼과 창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자신의 생존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이 세상에 알려지고 왕이 되었습니다. 다니엘도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의 생존을 책임져 주시고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바울도 좋은 가문에서 좋은 학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신뢰하기는커녕, 오히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가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목적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들꽃 하나도 하나님이 있게 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하물며 사람은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은 오래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오래 살면 죄만 더 짓겠지요. 생존 자체는 우리 삶의 목적이 아닙니다. 복음 때문에 살고, 복음을 위해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생존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라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영생을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분명한 답을 가지고 살아가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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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9-11
  • 목회단상> 시원한 생수를 마시며 생각하다
    장윤석 목사 < 하늘사랑의 교회>     여름은 무더운 날씨로 인한 갈증 때문에 누구나 물을 많이 찾습니다. 사람 몸의 70% 이상이 수분으로 되어 있으니 물을 많이 마셔야 건강하다는 주장은 정설입니다. 특히나 운동량이나 활동량이 많은 사람은 더 많이 물을 마셔 주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학교 운동장 수돗가에서 꼭지를 틀어놓고 고개를 젖혀서 그냥 시원하게 수돗물을 마셨습니다. 그때 누군가 똑똑한 척 말했습니다, “너 그거 알아? 어느 나라는 물을 사 먹는다더라” “뻥 치시네~ 봉이 김선달이냐, 차라리 공기도 사서 마신다고 해라” 이랬던 시절이 있습니다. 이제는 반드시 정수된 물이나, 생수를 사서 마셔야 합니다. 이처럼 매일 마시는 물의 변화는 세상이 얼마나 오염되었는지를 알려 줍니다. 그 외에도 물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많이 줍니다. 철학자이자 수필가였던 고 안병욱 교수는 “물은 변화와 적응의 천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물은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고, 모난 그릇에 담기면 모나고, 날씨가 더워지면 수증기로 올라가고, 하늘에서는 구름으로 떠 있다가 또 땅으로 내리고, 추우면 얼음이 되며 자유자재로 변신합니다. 물은 흐르며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가 있으면 돌아서 가고, 땅속으로 들어가고, 때로는 조용히 넘쳐서 흐릅니다. 여러 환경에 잘도 적응합니다. 정말 변화와 적응의 천재입니다. 또 물은 약한 것 같지만 가장 강합니다. 홍수에 다리도 집들도 다 떠내려가 버립니다. 물로 불을 끄기도 하지만, 물은 쇠를 녹슬게 해서 결국 무너뜨립니다. 가장 배울 것은 물은 언제나 낮은 데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물은 결코 위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높은 데서 떨어지는 물일수록 더 큰 힘이 생깁니다. 낙차가 큰 폭포나 많은 물을 방류하는 댐에서는 큰 전기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서 섬긴다면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많은 물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셔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를 믿는 자들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저주에서 행복으로 옮깁니다. 물처럼 낮은 곳으로 임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엄청난 운동에너지가 발생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가를 좋아합니다. 무더운 여름, 계곡에 흐르는 물은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그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휴가 때 계곡 펜션이나 방갈로에 묵으면 시원한 물소리가 계속 들립니다. 결코 작은 소리가 아님에도 그 속에서 단 몇 시간만 자도 몸과 마음이 개운해집니다. 이상하지요. 다른 소음은 숙면을 방해하는데 물소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은 모든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의 생명에도 꼭 필요합니다. 물의 변화와 적응, 그리고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능력, 그 소중함, 이 모든 것들을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물은 예수님의 성품을 똑 닮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7장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생수를 마시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구원의 생수이십니다. 이 생수를 마음껏 마시면 우리 영혼이 살아납니다. 이번 부흥회를 통하여 사막같이 메마른 우리 영혼이 물댄동산같이 회복되길 기대합니다. 흐르는 맑은 물과 같이 모든 사람, 모든 환경에 생명을 주는 신앙이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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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7-24
  • 목회단상> 나누고 베푸는 사람
    장윤석 목사 <하늘사랑의 교회>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생을 세 가지 곤충에 비유했습니다. 가장 먼저 거미와 같은 사람입니다. 거미줄에 걸려들면 잡아먹는 거미와 같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사는 사람입니다. 다음은 개미와 같은 사람입니다. 부지런히 일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지만,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는 꿀벌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꿀벌은 열심히 날아다니며 꿀을 모읍니다. 이 꽃, 저 꽃 날아다니며 수술과 암술을 붙여주고 열매를 맺게 도와줍니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서 남에게도 사랑을 베풀고, 공동체에 큰 유익을 주는 사람이 꿀벌 같은 사람입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은 꿀벌과 같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서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성찬은 예수님이 나누어주신 생명을 기념하는 기독교의 성례입니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우리도 또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나누고 베풀고자 하는 다짐으로 받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꿀벌과 같은 사람입니다. 받은 생명과 사랑을 서로 나누며, 여기저기 다니며 받은 은혜를 나누며 베푸는 사람입니다. 사랑의 꽃이 피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25년 정도 목회를 하면서 꿀벌 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유스도, 빌레몬, 루디아와 같은 동역자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분들은 물질로, 어떤 분들은 기도로, 어떤 분들은 봉사함으로, 어떤 분들은 목회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알아줌으로, 어떤 분들은 변함없이 한결같은 지지로 힘이 되어 줍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됐는지 모릅니다. 목회자들은 이런 분들 때문에 힘들고 외로운 길을 묵묵히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도 목회자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 사역에 힘이 되어주는 꿀벌 같은 성도들이 있었기에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2024년도 벌써 한 해의 절반을 지나면서 다시금 내가 받은 사랑과 은혜를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모든 것이 은혜이며 사랑의 빚진 자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자에게 성도는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대상인데, 나는 오히려 사랑과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뭔가를 하자고 하면, 신뢰하고 물심양면 아끼지 아니하고 지지하며, 저의 연약함을 채우고자 늘 수고를 아끼지 않는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생명을 나누어 주셨는데, 성도들은 꿀벌처럼 저렇게 아낌없이 섬기고 베푸는데, 나는 평생에 나눈 것이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저녁부터 필리핀 선교팀이 선교지 여름성경학교를 위해서 출발합니다. 인천 CCC 청년들과 우리 청년부가 영종 지역 도시전도를 위해서 비지땀을 흘리며 오늘까지 사역합니다. 교회의 여름 행사들을 준비하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다시 성찬을 받으며 다짐해 봅니다. ‘꿀벌 같이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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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7-10
  • 목회단상> 기도 -
      장윤석 목사 <하늘사랑의 교회>       부르짖는 기도에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은 교회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한국의 도시와 마을마다 십자가가 세워지고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동력은 기도입니다.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는 한국교회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습니다. ‘주여 삼창’과 통성기도(부르짖는 기도)는 한국교회의 열정과 부흥의 핵심을 이룹니다. 과거 새마을 운동의 노랫말에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새벽마다 교회에서 울리던 새벽 종소리와 나라를 위한 통성기도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온 나라가 교회의 새벽기도 종소리에 맞춰 일어나 산업현장으로 나가며 경제 발전에 매진하는 모습은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무기력한 모습의 원인은 그런 기도를 잃어버린 데에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영광은 부르짖는 기도가 회복될 때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부르짖는 눈물의 기도는 교회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부르짖는 기도를 수준이 낮은 기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귀가 안 먹었는데 왜 이렇게 소리쳐야 하나?”는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 수준이 낮은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이며, 10분도 채 기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강력하고 뜨겁게 마음을 쏟아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은 아름답고 귀한 것입니다. 우렁찬 합심기도 소리는 큰 권능이 있어서 귀신들을 떨게 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성에는 힘이 있습니다. 평소에 자신 있게 강한 발성으로 기도하지 못하면, 갑작스러운 기도 요청에 어려워하기도 합니다. 발성기도에 훈련된 사람은 강력한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영적인 일들은 소리(발성)로 이루어집니다. 설교, 찬양, 기도, 전도, 간증 모두가 그렇습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는 훈련을 지속하면, 찬양과 기도가 힘 있게 나오며, 답답함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단순히 한국교회의 문화가 아니라 성경이 강조하는 기도의 형태입니다. 성경에는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명령과 그 응답에 대한 약속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예레미야 33:3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기 위한 강력한 도구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라면, 교양 있게 “안녕하세요, 거기 지나가시는 분, 지금 바쁘세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를 좀 건져주실래요?”라고 하지 않을 겁니다. 목숨을 걸고 큰 소리로 “사람 살려!”라고 외칠 겁니다. 우리는 환난 때에 전심을 다 해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한국교회의 부흥과 영광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부르짖는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선교와 부흥회, 성경학교 등 여름 행사를 준비하는 중입니다. 매일의 새벽 기도, 또 여름 행사 준비를 위한 40일 저녁 기도에 동참하여, 함께 부르짖어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늘의 능력과 영광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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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6-26
  • 목회단상> 책임과 배려의 자세
    장윤석 목사 <하늘사랑의 교회>     성도는 두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 시민권이고, 또 하나는 대한민국 시민권입니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성도로서 나라를 위하는 길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어린 시절 해 질 녘 동네 풍경을 그려 봅니다. 공터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습니다. 저녁밥 먹을 시간이 되어 갑니다. 엄마가 큰 소리로 부릅니다. “○○아,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라!” ○○이가 얼른 엄마 따라 들어갑니다. 이런 상황이면 ○○이가 아직 어린 나이일 겁니다. 열 몇 살만 먹어도 엄마가 부른다고 금방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친구들과 놀고 있는 지금 상황을 그냥 관둘 수 없습니다. 하던 게임이라도 끝나고 나서 들어갑니다. 자신의 사회적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곧 갈게요, 먼저 드세요”라고 하든지, 저녁을 안 먹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가 자기 공을 가지고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엄마가 부릅니다. 그때 공까지 가지고 엄마 따라 집으로 간다면, 친구들까지도 게임을 못하게 됩니다. 그때 엄마를 따라가더라도 공은 친구들에게 놔둘 수 있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친구들과의 인간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감이 있는 겁니다. 나이 들수록 자신의 판단에 스스로 책임을 지며 행동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뜻은 책임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며,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거나 불리해지는 상황에서도 책임질 부분은 지는 것이 어른입니다.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존경할 만한 분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누군가 책임 있는 희생을 치른 까닭에 오늘 우리가 민주사회의 혜택을 입고 살아갑니다. 그 일에 기여도 없이 찾아온 좋은 시절이 내게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시국에 대한 책임감으로 각자의 소신을 표현하는 분들을 존중합니다. 자신들의 시간과 경비를 들여가며 시대의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진영을 떠나서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아쉬움이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과 다른 생각을 정죄하는 태도는 아쉽습니다. 같은 시국을 두고도 어떤 분들은 큰 위기감을 가지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분들은 그 정도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두 명의 기독교인이 각자의 신앙 양심을 가지고 한 사람은 왼쪽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나만이 옳다고 기도해서 하나님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누구도 완전히 옳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 기초 위에서 건강한 사회를 위한 법치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저마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나라 사랑을 실천하되, 서로의 양심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동시에 필요한 것 같습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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