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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산을 넘어서
어떤 여인이 8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습니다. 그중 3명은 청각장애, 2명은 시각장애, 1명은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아홉 번째 아기를 임신 중이지만 성병에 걸려있습니다. 다수의 사람은 ‘낙태해야 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음악 천재 ‘베토벤’입니다. 세계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는 투표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3명의 후보가 있습니다. 후보 A : 부패한 정치인들과 결탁한 적이 있고, 두 명의 부인이 있으며, 줄담배를 피우고, 하루에 8~10병의 마티니를 마신다. 후보 B : 두 번 회사에서 잘린 적이 있고, 정오까지 잠을 자고, 대학 시절 마약을 복용한 적 이 있고 위스키를 즐겨 마신다. 후보 C : 전쟁 영웅이다. 채식가였으며 담배를 피우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 맥주를 가끔 마신다. 불륜관계도 가져본 적이 없다. 당신은 어떤 후보를 택하셨습니까? 후보 A는 루즈벨트, 후보 B는 윈스턴 처칠, 후보 C는 아돌프 히틀러라고 합니다. 선입견(편견)은 인간이 가진 못된 생각입니다. 편견으로 사람을 대하다가 실수한 경험이 있을 겁니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면 가난한 집 아이가 먼저 의심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은 사람의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볼 것을 권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정오에 기도하던 중, 보자기에 가득 담긴 부정한 것들을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먹으라 했고,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부정한 것은 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내가 깨끗하게 했으니 먹으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고 그들에게로 가라는 뜻이었습니다. Ice breaking - 얼어붙은 생각, 즉 편견을 깨뜨리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편견을 깨뜨리고 고넬료의 집으로 갔을 때,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수백 년 동안 편견으로 인한 멸시와 차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찾아가셨고, 손을 내밀어 구원해 주셨습니다. 10명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후에 그에게 감사한 유일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음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는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을 찾으신 사건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는 먼저 사마리아에 대한 편견을 깨뜨려야 합니다(행1:8). 사마리아는 유대 땅과 가장 가깝지만, 편견 때문에 땅끝보다 멀고 어려운 곳입니다. 가깝지만 오히려 더 멀고 불편한 사마리아 같은 관계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을 품고 넘어서면 땅끝까지라도 갈 수 있습니다. 더 깊고 풍성한 관계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런 관계를 품고 넘을 수 있다고 격려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처럼, 오히려 사마리아인이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편견을 깨신 분입니다. 결국 내 안에 수많은 편견도 예수로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 바람, 성령 바람으로 편견과 오해를 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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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 만남과 이별을 대하며
만남과 이별을 대하며 새 가족 등록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만남이 많다는 것은 목사로서 행복입니다. 가수 노사연 씨의 ‘만남’이란 노래 속에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솔직히 가사가 여기까지 밖에 기억이 안 나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만남 속에 우연은 없습니다. 만남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우린 부모님과의 최초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를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죽고 난 후에 눈을 뜰 때, 영원한 존재들과 새로운 차원의 만남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만남은 설렘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만남 뒤에는 이별이라는 그림자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우릴 아프게 합니다. 부모도,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사랑하는 연인과의 만남도 예외는 아닙니다. 살면서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사람이나 환경을 처음 대할 때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지나친 애착으로 이별을 감당치 못해서도 안 됩니다. 만남과 이별에 너무 무관심해도 안 되고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되기에 우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전제는 만남과 이별 속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때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도 만남의 축복을 누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만남이 축복되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하고 노력이 뒤따라야 하고 투자해야 합니다. 무관심과 이기심은 불행한 이별을 낳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이별도 있지만 대부분의 이별은 노력의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멀리서 사는 친척이나 친구와 전화 한 통 없이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 결국 멀어지고 만남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별 속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에 반드시 손해만은 아닙니다. 이별은 아쉽지만,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준비이며 서로를 위한 하나님의 선이기에 축복하며 보낼 수가 있습니다. 살면서 누구에게나 만남이 축복되고, 이별이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보다 야망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만남은 언제나 설레고 행복했지만, 이별은 언제나 아팠습니다. 만남과 이별이 반복될수록 그런 감정이 무뎌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도 만남은 행복하고, 이별은 아쉽고 아픈 것은 아직 미숙해서일까요? 그래서 나름 터득한 방법이 있다면, 헤어질 때 인사를 잘하는 것입니다. “어딜 가든 하나님과 동행하세요” "그리고. “다시 만나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큰 복은 없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두 번의 교회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별이라 아팠고, 또 다른 사정으로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헤어지는 인사를 잘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곳에서 다시 만납시다” 참석한 교우들과 함께 찬송도 불렀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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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눈으로 사랑을 말해요
- 개는 입으로 말을 못 합니다. 그래서인지 개는 사람에게 눈으로 말합니다.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서 새까맣고 큰 눈으로 주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반가움을 표합니다. 식사 때면 발치에 앉아 눈으로 ‘뭐라도 달라’고 말합니다. 물론 식탁 밑 그 눈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집에서 나 혼자인 것 같기는 하지만요. 동물과도 눈으로 무언의 대화와 감정을 나눌 수 있는데, 사람 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눈으로 말해요.?살짝이 말해요.?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라는 노랫말도 있습니다. 눈으로 여러 사람 중에서 단둘이서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눈빛으로 전 세계를 울릴 수도 있습니다. 한 해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사나 사진에 수여하는 퓰리처상이 있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인물의 눈망울은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큰 메시지를 세상에 던져주기도 합니다. 이지선 교수는 ‘지선아 사랑해’라는 간증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대학생 시절 교통사고로 몸의 55%를 3도 화상을 입고, 40번의 대수술을 거치고서야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한 화상으로 얼굴은 다 녹아내리고, 양손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은 다 절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바로 지금이라고 말합니다. 굳이 다시 사고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녀의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게 한 가장 중요한 경험은 눈빛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고 후 병원으로 옮겨져 화상 수술을 받고, 얼굴을 돌돌 감고 있던 붕대를 처음 풀던 날의 경험을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얼굴을 본 엄마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어요.”?사고 전이나 사고 후나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여전했다는 것. 한 존재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얼마나 그 존재에게 안정감을 주고 자존감을 부여하는지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어떤 분은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집에 누워 있는데, 부인이 빨래를 개라고 시켰답니다. 자신은 암 환자니까 이제 그런 일을 안 시킬 줄 알았답니다.?‘나 환자잖아~’?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산더미 같은 빨래를 자기 앞에 밀어주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뛰어가다 넘어졌습니다. 넘어진 아이는 호들갑 떠는 부모를 보는 순간 울음보가 터집니다. 그러나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면, 자기도 대수롭지 않은 듯 스스로 털고 일어난다고 합니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약하고 서툰 못난 나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안정감은 나를 바라보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입니다. 그 눈빛을 느껴본 사람은 편해집니다. 그 안정감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한결같은 사랑으로 잔잔히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빛입니다. 여러분, 느끼십니까! 저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 느낄 수 있습니다.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찬양을 불러보세요.?“하나님,?사랑의 눈으로!?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그 사랑의 눈빛으로 자녀를 바라본다면, 자녀는 안정감을 가지고 꿈을 향하여 도전할 것입니다. 그 눈빛으로 교인들이 서로를 바라본다면 교회는 안정감을 가지고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눈빛만 보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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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눈으로 사랑을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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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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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이 되는 비결
- 교회력으로 맥추절은 한 해의 하프타임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절기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 그리고 장래에도 인도하실 은혜를 기대하며 믿음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와 같습니다.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바둥대는 것을 한 소녀가 보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가시덤불을 헤치며 들어가 나비를 구해줬습니다. 소녀의 팔과 다리는 가시에 찔려 피가 흘렀습니다. 그때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나비가 순식간에 천사로 변하더니 소녀에게 다가왔습니다. 천사는 자기를 구해준 은혜에 감사하다며 소원을 한가지 말하면 들어주겠다 했습니다. 소녀는 소원을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그때 천사가 소녀의 귀에 무슨 말을 소곤대더니 ‘뿅’ 하고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 소녀는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웃으며 앞선 일을 들려줬습니다. “나비 천사가 귀에다 대고 이렇게 속삭이는 거야. ‘구해줘서 고마워요. 소원을 들어드릴게요. 무슨 일을 당하든지 감사하다고 말하면 행복하게 될 거예요.’ 그때부터 무슨 일에든 감사하다고 했더니 정말 평생 행복했던 거야. 사실 천사가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니야. 누구든지 만족할 줄 알고 매사에 감사하면 행복을 누리게 되지” 할머니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이 가득했습니다. 감사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교훈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성경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합니다. 감사도 원망도 습관입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은 늘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합니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이든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귀에 들린 대로 해주신다고 합니다. 말을 잘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라고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한 이유가 어이가 없습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있을 때는 떡과 고기를 먹었는데,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고 보니까 고기도 없다. 차라리 우리가 거기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이리로 데리고 왔냐”고 원망합니다. 이들은 자유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배만 부르면 되는 딱 노예 그대로였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종이 아닌 자유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기에 최고의 순간, 최고의 방법으로 최고의 것을 주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기쁨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할 때, 또 다른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됩니다. 한해의 반환점에 서서 감사함으로 행복의 문을 열고, 하반기를 힘차게 시작하길 기도합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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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람이 되는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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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눈으로 사랑을 말해요
- 개는 입으로 말을 못 합니다. 그래서인지 개는 사람에게 눈으로 말합니다.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서 새까맣고 큰 눈으로 주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반가움을 표합니다. 식사 때면 발치에 앉아 눈으로 ‘뭐라도 달라’고 말합니다. 물론 식탁 밑 그 눈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집에서 나 혼자인 것 같기는 하지만요. 동물과도 눈으로 무언의 대화와 감정을 나눌 수 있는데, 사람 간에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눈으로 말해요.?살짝이 말해요.?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눈으로 말해요”라는 노랫말도 있습니다. 눈으로 여러 사람 중에서 단둘이서만 알 수 있는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눈빛으로 전 세계를 울릴 수도 있습니다. 한 해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사나 사진에 수여하는 퓰리처상이 있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인물의 눈망울은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큰 메시지를 세상에 던져주기도 합니다. 이지선 교수는 ‘지선아 사랑해’라는 간증집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대학생 시절 교통사고로 몸의 55%를 3도 화상을 입고, 40번의 대수술을 거치고서야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심한 화상으로 얼굴은 다 녹아내리고, 양손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들은 다 절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바로 지금이라고 말합니다. 굳이 다시 사고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녀의 자존감이 흔들리지 않게 한 가장 중요한 경험은 눈빛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고 후 병원으로 옮겨져 화상 수술을 받고, 얼굴을 돌돌 감고 있던 붕대를 처음 풀던 날의 경험을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얼굴을 본 엄마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어요.”?사고 전이나 사고 후나 자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이 여전했다는 것. 한 존재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얼마나 그 존재에게 안정감을 주고 자존감을 부여하는지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어떤 분은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집에 누워 있는데, 부인이 빨래를 개라고 시켰답니다. 자신은 암 환자니까 이제 그런 일을 안 시킬 줄 알았답니다.?‘나 환자잖아~’?해도 듣는 둥 마는 둥, 산더미 같은 빨래를 자기 앞에 밀어주는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뛰어가다 넘어졌습니다. 넘어진 아이는 호들갑 떠는 부모를 보는 순간 울음보가 터집니다. 그러나 엄마가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면, 자기도 대수롭지 않은 듯 스스로 털고 일어난다고 합니다. 넘어지고 실패하고 약하고 서툰 못난 나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안정감은 나를 바라보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입니다. 그 눈빛을 느껴본 사람은 편해집니다. 그 안정감을 바탕으로 다시 일어설 힘을 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언제나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를 한결같은 사랑으로 잔잔히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빛입니다. 여러분, 느끼십니까! 저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 느낄 수 있습니다. 느껴지지 않는다면 이 찬양을 불러보세요.?“하나님,?사랑의 눈으로!?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그 사랑의 눈빛으로 자녀를 바라본다면, 자녀는 안정감을 가지고 꿈을 향하여 도전할 것입니다. 그 눈빛으로 교인들이 서로를 바라본다면 교회는 안정감을 가지고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눈빛만 보아도 사랑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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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눈으로 사랑을 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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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이제야 나타났구나!
-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어 놓고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잠들게 한 후에 갈빗대를 하나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보여주시니 아담이 너무 좋아 감탄하며 고백합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우리가 쓰는 성경은 너무 밋밋해서 별 감동이 없습니다. 재미없겠지만 히브리어 원어 해석을 소개합니다. ‘이는~’으로 번역된 곳에 히브리어 ‘조트 하~파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조트’는 지시 대명사 ‘this’입니다. 그 뒤 개역 한글 성경에는 없는 감탄사 ‘하~파함’이 나옵니다. ‘하’는 정관사 ‘the’로서 ‘바로’라는 뜻이고, ‘파함’은 ‘now’ 곧 ‘이제’ 또는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파함’은 ‘바로 지금’ 또는 ‘바로 이때’입니다. 따라서 ‘하~파함’은 ‘이제야’ ‘드디어’라는 감탄사로서 감격과 흥분과 기쁨이 뒤범벅된 말입니다. 이런 뜻을 살려서 새번역 성경은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 공동번역 성경에는 “드디어 나타났구나...” 라고 번역했습니다. 훨씬 더 실감 나고 감동이 됩니다. 그리고 ‘하~파함’ 앞에 붙은 지시 대명사 ‘조트’가 ‘이는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그리고 ‘여자라 칭하니라’ 앞에도 나와서 세 번씩 지시하면서 아주 경쾌한 운율로 문장을 생동감 있게 살렸습니다. 이 말은 아담의 기쁨과 감동이 엄청났다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여자가 나타난 뒤로 아담의 눈에는 온 세상이 달리 보였습니다. 에덴동산의 각종 과일이 더 향긋하게 느껴지고, 동물들도 더 귀엽게 보이고, 강물이 은비늘처럼 반짝거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온 세상에 ‘조트 하파함’의 감동이 넘쳐납니다. 아담의 감탄 ‘이제야 나타났도다. 나의 뼈 중의 뼈, 나의 살 중의 살’은 아름다운 사랑의 시 낭송입니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시인이 됩니다. 개도 사랑할 때는 운율에 따라 짖는다고 합니다. 지금 아담은 시를 읊고 있습니다. 저절로 노래가 됩니다. 판소리 춘향가에서 이도령과 춘향이가 첫날밤에 만나서 사랑가를 부르지 않습니까. 아담의 고백은 그런 사랑가입니다. 이런 감탄과 감격 ‘조트 하~파함’이 계속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안타깝게도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아담의 입에서 하~파함이 쏙 들어갔어요. 세상 모든 것이 그저 무덤덤해졌어요. 에덴동산도 시시해지고 동물을 봐도 반갑지도 않고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해졌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도 은혜의 감격! 하~파함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시들해집니다. 예배도, 설교도 지겹고, 찬송도 맥이 풀리고, 기도도 안 되고 모든 것이 귀찮아집니다.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고 하품만 나옵니다. 은혜의 감격~하파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배에 하파함이 담기면 은혜가 됩니다. 봉사해도 지치지 않습니다. 심령에 하파함이 깃들면 얼굴이 해처럼 환해집니다. 가정이 사랑의 꽃밭이 됩니다. 마음속에서 신앙의 감격과 기쁨이 식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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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이제야 나타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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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봄 ? ‘눈물의 기도, 기쁨의 열매’
- 샬롬~ 저의 이름은 큰 기쁨이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저는 5녀 1남의 막내이자 4대 독자로 아들 손이 귀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올해 89세이십니다. 어머니는 마을 훈장을 하신 할아버지 밑에서 노비를 두고 소고기를 즐겨 드시는 전통 유교 집안, 지역 유지의 막내딸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여순반란사건, 6.25를 겪으며 집안의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설상가상 두 오빠까지 난리 통에 끌려가 억울하게 죽게 되었습니다. 그 충격으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신음 가운데 돌아가셨습니다. 부유하고 화목했던 가정이 한순간에 무너진 이후 어머니의 결혼 생활도 힘들었습니다. 아들 못 낳은 죄인으로 시댁에서 소박을 맞으며 마음의 병을 얻게 되었고, 하루하루 소망 없이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세월을 사셨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적에 옆집 할머니가 예수님을 믿는 분이셨고, 목사님이 심방 올 때면 항상 저희 어머니를 불러 같이 예배드리며 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지막이라는 간절함으로, 아들을 낳기 위해 어머니는 다시 교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임신하고 이번에도 딸을 낳으면 누나들 데리고 도망갈 마음을 먹을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미련은 전혀 없었습니다. 참고로 그때는 믿음이 없어서 교회도 가고 점집에 가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노산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시며 저를 낳았고, 마음을 다잡고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을 위해 일평생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살겠다 다짐하셨습니다. 아버지 또한 방황하던 삶을 접고 구두수선을 하시며 가정에 헌신하셨습니다. 제 이름은 어머니가 출석하신 교회 목사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제가 단순히 이 땅에 태어난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어머니를 살리셨고 우리 가정을 지키시며 가문에 큰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어머니는 무척 엄하시고 무서운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도시락을 여섯 개씩 싸시면서도 매일 새벽기도를 가시고, 예배를 목숨처럼 여기며, 없는 살림에도 십일조를 항상 드리셨습니다. 교회에 하는 모든 일 만큼은 정성과 힘을 다하셨습니다. 그 축복을 지금 저희 자녀들이 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 외가 쪽 집안에는 어머니만 유일하게 교회를 다니십니다. 언젠가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아버지 만나서 참 재미없고 힘든 인생 살았다." "어머니 만약 너무 좋은 아버지 만나고 집에 돈도 많고 어렸을 때처럼 부유하게 사셨으면 교회 가셨을까요?"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다가 "교회를 안 갔겠지" 말씀하십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지나간 삶도 의미가 있고 앞으로의 삶도 의미가 있는 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지금도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십니다. 연약한 여인을 돌아보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해서 흘린 눈물이겠지요. 하나님은 어머니를 택하시고 모진 인생을 통해 하나님을 찾게 하셨고, 믿음의 가문을 만드셨습니다. 지금도 자녀들 손주들을 통해 믿음의 확장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저는 제 이름의 소명대로 모든 땅에 큰 기쁨이 있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살아가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글 : 하늘사랑의 교회 익명의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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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봄 ? ‘눈물의 기도, 기쁨의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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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돌아온 탕자 이야기
- 17세기 네덜란드 예술의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라는 미술 작품이 있습니다. 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비유를 렘브란트가 해석하여 그려놓은 명작입니다. 그림을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 먼 타국에 가서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용서하고 품어 안음으로써 그들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을 보면 아버지는 살아 돌아온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데 그림에서 나타나는 아버지와 둘째 아들을 둘러싸고 있는 빛은 바로 그들이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아버지와 첫째 아들 사이에는 어둠이 있는데 이것은 첫째 아들이 아버지와 분리돼 있음을 드러냅니다. 성경을 보면 첫째 아들은 유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벌주지 않고 오히려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보며 화를 냅니다. 첫째 아들은 누구일까요? 당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지칭합니다. 예수님의 탕자 비유를 보면, 처음에는 아버지의 용서와 은혜가 필요한 둘째 아들이 탕자로 여겨졌는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진짜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첫째 아들임을 알게 됩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늘 몸을 붙이고 살았는데, 실제는 아버지의 마음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길을 잃고 불평과 원망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안타까운 마음에 첫째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1~32)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것이 은혜이며 부족함 없이 아버지의 집에서 모든 것을 누려온 것이 축복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것은 없고 모두 아버지의 것임을 감사하는 자에게는 사실 아버지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둘째 아들은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이 행복의 길이며 첫째 아들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은혜를 깨닫는 것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두 아들은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돌아온 탕자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집에 거하는 첫째 아들이기도 합니다. 항상 하나님 하나님께 감사하며 형제를 용납하고 사랑으로 섬겨주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아직도 세상을 사랑하여 아버지를 멀리 떠나 있는 잃어버린 탕자를 향하여 있습니다. 지선 전도사 찬양 콘서트와 부활절 뮤지컬이 우리만의 잔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소중한 사람들을 아버지의 집으로 이끌어 함께 하는 천국 잔치가 되길 기대합니다. < 2025 새생명축제 > - 장소 : 하늘사랑의 교회(중구 흰바위로 172) 4월 13일 저녁 7시 : 찬양 사역자 지선 초청 찬양집회 4월 20일 오전 11시 : 부활절 뮤지컬 ‘Amazing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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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돌아온 탕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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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안으로 초대합시다
- 지난 월요일 제자반 6기생들과 제주도 당일치기 여행을 했습니다. 쌀쌀맞은 날씨 땜에 겉옷을 입고 가길 잘했다 생각했습니다. 외투를 껴입은 우리 모습은 겨울인데, 우린 봄 안에 있었습니다. 우린 봄 길을 걷었습니다. 봄꽃 속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정호승의 시 <봄 길>의 앞부분만 인용해봅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있다. /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시처럼, 길이 끝나는 곳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의 길이 끝나는 곳은 죽음입니다. 시처럼, 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고, 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누가 생각나십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을 떠올립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길이 끝나는 죽음에서 부활하여 생명의 길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십니다.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한 봄 길이 되십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봄의 길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살면서 인생의 길이 끝나는 곳에 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굳게 닫힌 여리고 성벽 앞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수6:1) 여리고 성벽은 높이가 7.5m, 두께는 약6m 이상이며, 내벽과 외벽이 2중으로 되어 있어, 포를 쏘아도 무너지지 않을 규모입니다. 그런 성벽의 문이 굳게 닫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여리고 성의 굳게 닫힌 문은 길이 끝나는 곳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렇게 길이 끝나는 곳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길 “구하라 찾아라 두드리라 그리하면 얻겠고 찾겠고 너희에게 열리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여리고는 무너지고,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길 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봄 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은 봄 길입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믿고 그 길로 가면 축복의 땅에 설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승리의 길입니다. 그 길은 평안의 길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그 길을 알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서 초대합시다. 여기 길이 있다고! 여기 봄 안으로 오라고! 함께 봄 길을 걸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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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안으로 초대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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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우리 자녀들의 마음 밭은 어떤 밭일까요
- 요즘 새벽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풀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가장 잘 아는 비유의 말씀이 ‘씨뿌리는 비유’일 겁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밭에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좋은 씨가 뿌려지는 마음의 밭을 네 가지 종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자녀 세대를 복음화하는 비전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생각하며 우리 자녀들의 마음 밭은 어떤 밭일까 생각해 봅니다. 마음이 길가 같은 아이가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고 마치 맨땅에 헤딩하는 것 같이 막막합니다. 부드럽던 자녀의 마음이 길가가 된 것은 상처 때문일 겁니다. 아이들은 지나가는 불량배가 내뱉는 거친 욕설에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부모가 아껴서 해주는 말에 상처를 입습니다. “네 형 반만 따라가라” “넌 어떻게 집 밖엘 나가지도 않느냐” 등등. 부모가 생각 없이 던진 말들이 마음속에 상처가 쌓여 길가처럼 단단해진 것입니다. 돌밭 같은 마음을 가진 자녀도 있습니다. 누군가 무거운 돌덩이를 하나 던지고 갔습니다. 그걸 보고 다른 사람도 여기는 그래도 되나 보다 싶어 또 자기 짐을 던지고 갑니다. 결국,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무거운 짐이 쌓이고 또 쌓여 마음이 바위 밭이 되고 만 것입니다. 부모의 이혼이나 가난한 환경, 딴에는 노력해도 오르지 않는 성적까지, 자녀들은 지금 무거운 돌덩이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자녀의 마음은 가시가 자라서 정작 자라야 할 씨앗은 힘도, 소망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걸 두고 재물과 죄의 유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온 세상은 이런 유혹으로 가득합니다. 신앙을 키우려 해도 그보다 먼저 세상의 가치관이 아이들을 덮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럼 이 세 가지 밭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밭들은 포기하고 좋은 밭에만 열심히 뿌리면 될까요. 그래서 거기서 100배를 거두면 남는 장사입니까. 그럴 거라면 애초에 좋은 밭에만 골라 뿌리면 400배 거두니까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농부는 굳이 그 귀한 씨앗을 길가에도 뿌리고, 돌밭에도 뿌리고, 가시밭에도 뿌립니다. 자칫하면 씨앗을 다 버릴 판인데도 아까워하지 않고 뿌립니다. 그 밭에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농부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묵은 땅을 기경 하듯이 파고 또 파야 합니다. 길가처럼 굳어진 아이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손길이 필요합니다. 돌밭처럼 스스로 감당 못 할 커다란 문제들이 쿵쿵 떨어져 있는 답답한 아이들의 마음에서 돌덩이를 골라내주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가시덤불에 칭칭 감겨 있어서 힘을 못 쓰는 아이들의 마음 밭에서 가시넝쿨을 제하는 피 묻은 농부의 손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부모, 교육부서들과 앞으로 세워질 비전스쿨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세대로 세워나가는 헌신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때입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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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우리 자녀들의 마음 밭은 어떤 밭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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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누가 큰 자인가?
-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큰 자인가?’ 하는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자는 섬기는 자요, 으뜸된 자는 종이 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나라에서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힘을 가지고 큰 자로 대우합니다. 그래서 모두들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남을 낮추고 자신을 높이려 하다 보니 서로 다툼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반대로 “천국에서 큰 자는 섬기는 자, 스스로 종이 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살 동안 섬기는 것만큼 하나님 나라에서 실력이 되고, 종이 된 것만큼 높아진다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천국의 가치는 섬기는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는 어떤 자일까요? 섬기는 실력이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남에게 섬김만 받고 온 사람이 제일 작은 사람입니다. 교회 안의 직분은 계급이 아닙니다. 제직 임명을 받으면 그것만큼 더 많이 봉사하고 섬기라고 주어진 섬김의 직분입니다. 직분을 받아서 그 직분으로 인하여 많이 섬겼다면 주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는 인격과 실력을 만들었기에 그 직분이 복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직분을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스스로 종이 되어 섬겼느냐에 따라서 주님 나라에서 그 사람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그렿게 본다면, 주님 나라에서 가장 큰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예, 당연히 우리 예수님입니다. 주님은 오고 오는 모든 시대, 모든 민족을 섬기는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주님은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시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제자 된 우리들도 주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나라의 가치는 섬김의 가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교회에서든지, 가정에서든지, 직장에서든지, 이 사람을 만나든지 저 사람을 만나든지 섬기는 일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여 돈을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돈 가지고 뭐 할 것이냐?’ 물으십니다. 그럴 때 거짓됨이 없이 진정으로 ‘예, 주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일에 쓰겠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주님은 아낌없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사를 받았든지, 어떤 것을 받았든지,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할 일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두신 ‘남은 봉사, 남은 종노릇’ 하는 일에 사용해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는 말씀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길 원합니다. 섬기는 자는 어디를 가든지 필요한 자가 되고 환영받는 가치 있는 자가 됩니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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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누가 큰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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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가장 행복한 사람이 돠려면
- 한 소녀가 나비 한 마리가 거미줄에 걸려 바둥바둥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가시덤불을 헤치며 들어가 나비를 구해줬습니다. 소녀의 팔과 다리는 가시에 찔려 붉은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멀리 날아간 줄 알았던 나비가 순식간에 천사로 변하더니 소녀에게 다가왔습니다. 천사는 자기를 구해준 은혜에 감사하면서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주세요.” 그때 천사가 소녀의 귀에 소곤대더니 사라졌습니다. 소녀는 자라면서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임종을 눈앞에 뒀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어떻게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지” 비결을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웃으며 앞선 일을 들려줬습니다. “나비 천사가 다가오더니 이렇게 속삭이는 거야. ‘구해줘서 고마워요. 소원을 들어드릴게요. 범사에 감사하다고 말하면 평생 행복하게 될 거예요.’ 그때부터 무슨 일이든지 감사하다고 말했더니 정말 평생 행복했던 거야. 사실 천사가 내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니야. 누구든지 만족할 줄 알고 매사에 감사하면 세상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이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할머니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이 가득했습니다. 행복의 비밀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출애굽을 위하여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습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갑니다. 가나안을 가지 위해서는 긴 광야의 여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광야로 들어 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기저기에서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은 늘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늘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면 좋은 미래가 열립니다. 비록 광야에 서 있지만, 입술에 가나안의 소망과 감사가 있으면 가나안으로 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한 이유가 어이가 없습니다. 두 달 반 동안 고기와 떡을 못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애굽에서 종으로 있을 때는 떡과 고기가 있었는데 종에서 벗어나니 이제 떡도 없고 고기도 없다. 차라리 우리가 거기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이리로 데리고 왔느냐’고 불평합니다. 이들은 배만 부르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기에 최고의 순간, 최고의 방법으로 최고의 것을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참고,마6:31~32).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때 그 감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으로 다시 향합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복을 끌어옵니다. 2025년도는 더 많이 감사함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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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가장 행복한 사람이 돠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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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리:본’ 본질 위에 새로움을 더하다
- 희망으로 가득한 새해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15년 만에 상가 건물에서 벗어나 이곳에 교회를 건축하고 2020년도 송구영신 예배로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그날의 감격이 채가시지 않았지만, 벌써 5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3년간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은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팬데믹 기간 부흥하는 몇 안 되는 교회 중에 하나로 우리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단순히 교인 숫자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새가족반·멘토링 양육·제자훈련 등으로 마음을 나누는 동역자들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사랑방 리더, 멘토, 교사, 사역자들은 제가 어디에 가도 자랑하고 싶은 소중한 분들입니다. 예배는 감격과 은혜로 드려졌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행복한 공동체였습니다. 처음 교회 오시는 분들은 하나 같이 교회의 분위기가 밝고 친절해서 좋았다고 합니다. 외부에서 초대한 강사님들이나 손님들도 이구동성으로 은혜로운 분위기를 칭찬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가 좁다며 곧 넓은 곳(?)으로 가야 할 것 같다는 말들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와 붙어있는 큰 땅에 교회가 다시 세워질 것이라고 예언 같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일하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에벤에셀의 기념비라도 세우고 싶습니다. 모두 열심히 달렸고 잘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익숙하게 해오던 것들이 이제 낡은 옷이 되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지어 장윤석 목사라는 인물도 식상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이런 어쩔까? 지난해 11월 목회 구상을 위하여 조용히 기도굴에서 기도하며 떠오른 단어가 ‘갱신’입니다. ‘그렇다. 안주하지 말자. 멈추면 그 자리가 아니라, 쓰러진다.’ 기도원에서 ‘갱신’이란 단어 하나 붙잡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모순이 있습니다. 단어가 가진 의미와 달리 ‘갱신’ 촌스럽지 않나요? 그래서 조금 더 세련되게, ’리:본 본질 위에 새로움을 더하다’ 이렇게 2025년 교회 표어를 정했습니다. 리:본, 풀이하면, ①다시 본질로, ②본질 위에 새로움을 더하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복음’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서, 낡은 것은 갱신 = 새 옷 입도록 해야 합니다. 예배도, 사역도, 목사도, 새 옷을 입고, 새 부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마다, 새 은혜, 새 노래, 새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길 사모합니다. 새 옷을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게을러서도 안되고, 귀찮아해서도 안 됩니다. 예전에 삼성의 이건희 씨가 “시대에 발맞추어, 다 바꿔봐라. 마누라하고 자식 빼고...” 바꿀 수 없는 이것은 본질입니다. 그렇게 갱신, 혁신을 외치며 삼성이 20년 이상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갱신하지 않으니까, 애플을 넘지 못하고, 대만 중국에도 밀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국내에서도 만년 2위였던 SK 반도체에 1위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거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생베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지 말라.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라” 말씀하셨습니다. 2025년도 우리 교회와 개인의 신앙이 “리:본”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하늘사랑의교회 장윤석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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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단상> ‘리:본’ 본질 위에 새로움을 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