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21(금)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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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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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7-13

실시간 목회단상 기사

  • 목회단상> 책임과 배려의 자세
    장윤석 목사 <하늘사랑의 교회>     성도는 두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 시민권이고, 또 하나는 대한민국 시민권입니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성도로서 나라를 위하는 길은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어린 시절 해 질 녘 동네 풍경을 그려 봅니다. 공터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습니다. 저녁밥 먹을 시간이 되어 갑니다. 엄마가 큰 소리로 부릅니다. “○○아,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라!” ○○이가 얼른 엄마 따라 들어갑니다. 이런 상황이면 ○○이가 아직 어린 나이일 겁니다. 열 몇 살만 먹어도 엄마가 부른다고 금방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친구들과 놀고 있는 지금 상황을 그냥 관둘 수 없습니다. 하던 게임이라도 끝나고 나서 들어갑니다. 자신의 사회적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곧 갈게요, 먼저 드세요”라고 하든지, 저녁을 안 먹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가 자기 공을 가지고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엄마가 부릅니다. 그때 공까지 가지고 엄마 따라 집으로 간다면, 친구들까지도 게임을 못하게 됩니다. 그때 엄마를 따라가더라도 공은 친구들에게 놔둘 수 있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친구들과의 인간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감이 있는 겁니다. 나이 들수록 자신의 판단에 스스로 책임을 지며 행동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어른이 된다는 뜻은 책임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며, 사회생활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거나 불리해지는 상황에서도 책임질 부분은 지는 것이 어른입니다.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라면 존경할 만한 분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누군가 책임 있는 희생을 치른 까닭에 오늘 우리가 민주사회의 혜택을 입고 살아갑니다. 그 일에 기여도 없이 찾아온 좋은 시절이 내게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시국에 대한 책임감으로 각자의 소신을 표현하는 분들을 존중합니다. 자신들의 시간과 경비를 들여가며 시대의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은 진영을 떠나서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아쉬움이 있습니다. 자신의 주장과 다른 생각을 정죄하는 태도는 아쉽습니다. 같은 시국을 두고도 어떤 분들은 큰 위기감을 가지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분들은 그 정도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두 명의 기독교인이 각자의 신앙 양심을 가지고 한 사람은 왼쪽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나만이 옳다고 기도해서 하나님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누구도 완전히 옳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 기초 위에서 건강한 사회를 위한 법치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저마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책임감을 가지고 나라 사랑을 실천하되, 서로의 양심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가 동시에 필요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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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6-19
  • 목회단상> 편한 길보다는 평안의 길을
    장윤석목사 <하늘사랑의 교회>     새벽기도 인도를 다른 분에게 맡길 때면, 새벽기도 시간에 ‘오늘은 아침까지 푹 좀 쉬자’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몸은 잠시 편할 수 있겠지만,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새벽 예배를 참석하고 잠시라도 기도를 하고 나면 평안합니다. 목회를 하는 동안 언제나 육신이 편한 길보다는 사명에 합당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편한 것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전과 비교해 보면 세상은 살기 더 편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갑니다.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이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편안함이 아닌 평안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은 몸을 편하게 해줄 수 있지만 평안을 주지는 못합니다. 평안은 하늘로부터 오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평안으로 근심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편안함은 우리를 나약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유를 배달시켜 마시는 사람보다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 편하게만 살려고 하면 나약해집니다. 신앙생활도 너무 편하게만 하려고 하면 신앙이 나약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에게 불편함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강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불편한 중에 신앙의 야성을 회복합니다. 광야는 불편한 곳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훈련을 받습니다. 그곳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 만나와 생수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런 기적들을 경험하면서 물질과 환경을 초월하는 하늘로부터 주신 평안을 선물로 받습니다. 지금 사방이 거친 광야와 같은가요? 많이 불편한가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 보세요. 더욱 큰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공군 전투기가 추락했습니다. 조종사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지만 추락 원인이 조종사의 실수였습니다. 베테랑 조종사였던 그가 비행에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암 투병을 하던 어린 딸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와 직장을 한꺼번에 잃은 그는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빠가 하늘을 나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딸의 바람을 이뤄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탐사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극한의 체력과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테스트를 모두 통과하고 달 탐사선의 선장으로 발탁됐습니다. 1969년 그가 탄 아폴로 11호는 드디어 달에 착륙했습니다. 그는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사람으로 기록됐습니다. 그의 이름은 닐 암스트롱입니다. 그는 실패한 비행기 조종사였고 꿈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여 우주비행사가 되어 더 놀라운 성과를 이뤘습니다. 하늘을 잃었지만 우주를 얻었습니다. 혹시 실패하셨습니까?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힘드십니까? 하나님만을 의지하세요. 놀라운 평안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 평안을 안고 일어나 다시 도전해 보세요. 잃은 것보다 더욱 큰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너무 편한 길로만 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명의 길은 편한 길은 아니지만 그 길에는 평안이 있습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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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6-05
  • 목회단상> 더 빛과 소금으로!
      장윤석목사<하늘사랑교회>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 루이 16세가 밖에서 들리는 군중들의 함성을 듣고 신하에게 “폭동이냐?”고 물었더니, 신하가 “아닙니다.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궁궐 밖과 궁궐 안의 온도 차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이 국민 여론을 무시하고 사람을 임명하고 법안을 강행 처리하면서, 베르사유의 장미에 나오는 프랑스 귀족들처럼 ‘왜 사람들이 저렇게 반대하는지 모르겠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권력의 안과 밖에서 느끼는 온도 차이일 것입니다. 통치자가 구중궁궐 속에 갇혀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시점부터 그 나라는 명운이 기울게 됩니다. 한때 몽골족이 세계를 정복하며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 몽골의 왕(칸)은 백성들 속에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이런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교회도 안과 밖의 온도 차이가 크면 세상 속에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싫어해도, 어려운 사람들을 대가 없이 도와주는 곳은 교회입니다. 나라가 해야 하는 일을 교회가 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구한말 선교사님들이 복음을 들고 와서 학교와 병원을 세우며 개화를 주도했습니다. 해방 이후 교육과 복지는 주로 기독교가 맡아 왔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버려지고 굶어 죽는 이들을 교회가 나서서 챙겼습니다. 지금도 교회는 노숙자들에게 무료급식을 제공하고, 지역아동센터와 다문화 지원센터를 운영하며,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어려운 이웃들의 수도·전기 미납 공과금을 조건 없이 대납해 주기도 합니다. 물질적인 봉사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돌봄도 교회가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착한 일은 나라조차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관련 기사와 인터넷 댓글들을 보면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인 것을 봅니다. 일부 교회의 비리나 심지어 이단 교회의 반사회적 행위까지 교회인 양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 불에 기름을 붓듯 비난은 금방 확산됩니다. 우리는 이렇게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도 차이입니다.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그렇게 나쁜 왕은 아닙니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오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소문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쁜 짓은 루이 14세와 루이 15세가 더 많이 저질렀습니다. 루이 16세는 의회에 평민을 참여시킬 만큼 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쓰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가 왕이라는 이유 때문에! 교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교회라는 이유 때문에! 정말 세상에 손가락질받을 만한 교회는 소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도, 교회라는 이유 때문에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위선자 취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더 강한 빛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부패할수록 더욱 소금의 맛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더 밝은 빛을, 더 맛을 내는 소금을 지금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으로 용서, 긍휼, 섬김으로 주변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더 빛과 소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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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5-29
  • 목회단상> 삶의 속도를 늦추고 진정한 삶에 헌신하라
    장윤석목사<하늘사랑의 교회>     일반 자동차의 엔진이 분당 4천 회전을 한다면, 고급 경주용 차는 분당 1만 회전을 합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아침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마자 엔진을 '분당 1만 회전'으로 올리고, 밤에 침대에 쓰러질 때까지 그 속도를 유지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살아가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하나님과의 소중하고 조용한 시간을 거의 허용하지 않습니다. 분주함은 영적 성장의 적이며, 바로 이것이 성경에서 세상적인 것으로 지칭되는 이유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으로 구체화 됩니다. 성도는 남들과는 다른 북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 같습니다. 그 북소리를 들으려면 시간을 헌신해야 합니다. 쓰다 남은 시간 말고, 미리 떼어 놓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조용히 멈추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일기를 기록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됩니다. 여기서 일기는 영적인 기록으로서, 오늘의 경험, 그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돌이켜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고든 맥도날드(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IVP)는 일기 쓰기가 영적 발전에 큰 진전을 가져다준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점검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로 인해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일기를 통해 우리는 과거의 결정을 반성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습니다. 또한,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우리 삶의 속도를 늦추어 줍니다. 이런 방식으로 멈추고 느려짐 속에서 보이지 않던 하나님과 그분의 음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 시간 동안 우리 영혼은 안식을 누리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진정한 기독교의 향기는 이렇게 서두르지 않고 고요히 하나님의 영과 교통하는 순간에서 비롯됩니다. 끊임없이 활동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 활동이 교회와 관련된 것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평상시에 익숙했던 구절이, 갑자기 눈에 확 들어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에 딱 맞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 구절이 바뀐 것도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 중 하나로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그 구절이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시점에 성령님이 그 구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음식을 살 돈이 없을 때 이웃이 음식을 갖고 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내가 너에게 공급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슬픔을 이해하고 우리를 위로하려고 애쓰며 안아 주는 친구의 품속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보살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것들은 삶의 속도를 줄일 때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진정한 삶에 헌신할 때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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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5-16
  • 목회단상> 온전한 순종의 영역
    장윤석목사(하늘사랑교회)   창세기 1: 28절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씀은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문화명령’이라고 합니다. 이 명령은 우리의 순종의 범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순종은 교회 안에서의 순종을 넘어서 모든 창조의 영역 속에서의 순종이어야 합니다. 이 명령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해도 온전한 순종이 아닌 반쪽짜리 순종에 그치고 맙니다. 우리는 자신의 직업과 일, 세상 속에서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이 문화명령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컨대 공부하는 사람은 학문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여 연구함으로 그 영역을 발전시키는 것이 문화명령의 실천입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하는 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습니다. 죄악된 일, 거룩지 못하고 더러운 일, 피해야 할 일, 열등한 일,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로 생각합니다. 거룩한 일, 우등한 일은 교회 안에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 좋은 사람들은 모두 교회 안에만 있으려고 합니다. 세상 일은 필요악으로 어쩔 수 없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일이 다 거룩한 일이며, 만인이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온 세상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교회에서뿐 아니라 집에서, 부엌에서, 작업장에서, 들판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했습니다. 세상에서 하는 일(직업)이 하나님 섬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문화명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의 일상의 영역을 거룩하게 바꿉니다. 매일 매일 가장 좋은 고기와 뼈, 그리고 싱싱한 야채로 김치를 담는 소문난 곰탕집이 있습니다. 사장님은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는 곰탕 설렁탕 장사가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언제나 손님을 예수님 대접한다는 생각으로 장사를 합니다. 좋은 뼈는 10시간을 고으면 뽀얀 국물이 나온답니다. 어느날 뼈를 고았는데 누런 국물이 나왔습니다. 뼈 가게 주인이 실수로 좋지 못한 뼈를 납품한 것입니다. 뼈 가게 주인은 사과하며, 커피 프림을 타면 뽀얗게 된다며 오늘만 그렇게 장사하라고 조언했습니다. 못 먹는 뼈도 아니고 맛도 큰 차이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재료가 나빠서 장사를 못하게 되었다는 안내를 붙이고는 문을 닫았습니다. 이런 삶의 자세가 충성입니다. 눈 속임하지 않고 주께 하듯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곰탕 설렁탕 파는 일은 거룩한 일입니다. 그 설렁탕집 사장님은 지방에 사는데, 매주일 서울에 있는 본 교회로 나간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는 미식가라, 뭐가 맛있다 하면 서울도 가고, 광주도 찾아갑니다. 밥 먹기 위해서도 이렇게 다니는데, 예배드리러 왜 못갑니까’ 라고 반문합니다.   이 모습이 예배에도 충성되고, 삶에서도 충성된 균형잡힌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이분의 순종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곰탕을 팔면서도 순종하고 있습니다. 식재료로 더 맛있고 더 건강한 먹거리를 개발하여 삶을 풍성케 하는 문화명령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이 문화명령에 순종함으로 온전한 순종을 하는 신앙인이 되길 바랍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4-05-01
  • 목회단상 > 고속도로 휴게소와 교회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 지방으로 회의를 자주 다닙니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며 휴게소를 들렸습니다. 한때는 가장 붐비는 경부선의 명물이었던 곳인데, 낙후된 화장실과 급감한 차량 숫자에 놀랐습니다. 반면 돌아오면서 지나친 휴게소는 단순히 화장실 수준이 아니라, 거대한 복합문화 공간이었습니다. 세월을 잊고 자리만 지키고 잠자면 불패의 고속도로 휴게소 신화도 깨어지는구나! 이전에는 휴게소 내 주유소는 값이 비싸 이용하지 않던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저렴한 기름값에 기회가 되는대로 가득 채우는 곳으로 변신했습니다. 어떤 곳은 저렴한 가격에 경정비, 세차, 편의점, 카페, 택배 서비스까지... 이런 곳은 어김없이 그 넓은 공간이 차와 사람들로 북적거립니다. 생존을 위한 변화가 있는 곳은 사람이 모이고, 잠자듯 세월을 잊은 곳에는 발걸음이 끊기는구나! □ 교회는 영적인 휴게소, 주유소와 같은 곳입니다. 지치고 힘든 사람이 언제든 찾아와서 죄와 허물을 배설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더러워진 손을 씻고 세차를 하는 곳입니다. 성령의 기름을 가득 주유하고, 말씀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다시 힘내어 거룩한 대로를 달려갈 수 있도록 돕는 곳입니다. 언제든 쉬어갈 수 있는 영적 문화공간 역할도 합니다.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잠자면 도태됩니다. ‘언젠가 좋아지겠지’ 하는 나태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시대를 읽지 못하면 시대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안식과 채움을 줄 수 있는 영적 저장고가 되도록 예배와 기도를 살려내어야 합니다. □ 성도는 교회에 와서 성령의 기름을 주유하기 위해서 반드시 주유구를 열어야 합니다. ‘아멘’이 주유구를 여는 소리입니다. 설교와 기도, 찬양을 통해 은혜를 주실 때마다 큰 소리로 ‘아멘’ 하고 주유구를 열어야 합니다. 주님께 드릴 주유비가 있을까요? 오직 ‘감사’로 값을 지불합니다. 받은 은혜에 감사할 때 주님은 성령과 말씀의 기름을 예배를 통해 꽉꽉 채워 주십니다. 엔데믹 시대, 신냉전 시대, 곳곳에 전쟁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불확실성이 커가면서 많은 이들이 불안해하고 지쳐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신부에게 신랑이 오듯이 주님이 오셔서 모든 수고가 그칠 날이 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는 기름이 떨어지니 등이 꺼졌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해 빛을 계속 밝혔습니다. 믿음은 밤이 깊을수록 밝게 빛납니다. 교회는 기름 채우는 곳입니다. 믿음의 등을 밝히고 거룩한 길을 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교회에서 성령과 말씀을 가득 채워야만 지치지 않습니다. 급변하는 세상, 불확실한 세상에서 거룩한 길을 달려가기 위해서는 은혜의 기름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합니다. 주유비는 오직 감사뿐입니다. 시작하면 가능해집니다. 사랑하면 예뻐집니다. 운동하면 건강해집니다. 교회 오면 은혜받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며, 감사와 아멘으로 성령의 기름을 가득 채우시기 바랍니다. 예배와 기도의 우선순위를 다른 것으로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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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4-17
  • 목회단상 > 풍성한 삶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언젠가 누군가의 장기기증으로 6명이 '새삶'을 얻은 사례를 뉴스로 본 적이 있다. 의학 드라마를 볼 때, 한 번씩 장기기증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기도 했다. '장기기증'이라는 개념이 내 머릿속에 들어올 때마다 '나도 해야지...'하는 막연한 생각을 해왔던 것 같다. 이번 주 주일 설교 말씀의 주제는 ‘죽음’이었다. 누구나 죽는다. 불사신은 없다. 영원할 것만 같은 삶의 모든 부품들이 다 죽음 앞에서 무용지물이 된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인간은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다. '죽으면 다 끝'이라면 삶의 가치는 저하되고, 삶의 목적은 무난하게 살다 가는 것이나 혹은 언젠가 사라질 것들에 메인 것이 되지 않을까. 하나님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이 글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목적은 사실, 내가 너무 사랑하고 놓치고 싶지 않은 인연 중 혹시라도 죽음에 대해 사색하거나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믿는 이 소중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서이다. 사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죽음이 무겁고 어두운 주제 같지만, 죽음 이후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확실히 믿기에 그리 두렵지는 않다. 본 적도 없는, 경험하고 온 사람도 없는 천국을 믿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임을 안다. 그렇기에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가장 선하시고, 가장 지혜로우시며,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천국을 소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막상 장기기증 서약을 하려고 실행에 옮기니 내 마음에 불안함이 생겼다. '내가 이 서약을 하는 순간 죽음이 내 코앞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데?'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면서도, 사실 마음속에서는 이 세상을 더 살다가 가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이었다. 아직도 나는 이토록 연약하다. 어쩌면 삶의 끝까지 넘어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할 예정이다. 주일 말씀을 참고하자면... "죽음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 너머의 영원한 구원과 우리 존재에 대해 생각지 않습니다." "죽음을 가까이 두게 될 때, 회개와 순종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성화가 촉진되며 하늘의 소망을 견고히 잡게 됩니다. " ?그래. 죽음을 가까이 둔 채로 살고자 하는 한 걸음으로, 주어진 시간들로 빛나고 풍성한 삶을 만들길 바라는 뜨거운 마음으로, 장기기증 서약을 해야겠다. 사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금 당장 부르시진 않으실 것이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기에! 그러나 분명하게 다짐한 것은 다음과 같다. 언제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서 하나님께 칭찬받을 만한 삶을 살자. 죽는 그 순간에도 장기기증으로 생명의 복음을 전하자. 내 삶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는 걸 잊지 말자.  주(註): 이 글은 ‘죽음, 그 이후’ 설교를 듣고, 장기기증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딸 아이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입니다. 믿지 않는 친구들에게 믿고 있는 바를 알리고자 소통하는 글을 본인의 허락을 받아서 올립니다. 고난주간,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신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묵상하며, 우리는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4-03-27
  • 목회단상 > 내 편이 아니라도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요즘 대한민국이 위태로운 실정입니다. 구한 말 외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지도자들은 편을 나누어 대립하다가 일제 식민지라는 깊은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오늘은 한국은 미국과 중국을 양대 축으로 하는 신냉전, 북한의 핵무장 현실화, 경제 전쟁의 여파를 맞고 서 있습니다. 온 국민이 힘을 모아도 모자랄 판에 정치인들은 증오의 정치를 펼치고 있습니다. 증오로 가득 찬 사람들이 나라를 끌고 간다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다윗은 사울에게 오랜 세월 정치적 탄압을 받아 피신을 다닙니다. 그러다가 사울이 죽고, 유다 지파의 추대로 다윗은 왕으로 등극합니다. 드디어 다윗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힘을 가지게 되면 오만한 마음에 그 힘을 휘두르고 싶은 함정에 빠집니다. 다윗에게도 이런 시험이 왔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의 시신을 생명을 걸고 찾아와서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내줍니다. 그때 누군가 다윗에게 이를 친절하게 고자질합니다.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의 편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의 편이 아닌 야베스 사람들을 죽이거나 불이익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울에 대한 ‘신의’를 지킨 것을 높이 평가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다윗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신의’ 이구나. 내 편이 아니라 할지라도 신의를 지킨 사람들을 축복하고 상을 주네, 신의를 지키면 다윗은 나를 버리지 않겠구나’ 그러면서 다윗에게 생명을 거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더 큰 가치를 인정해 주니까, 더 큰 민심을 다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용사들이 모이면서 다윗 왕국은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기준 바로 세워야 합니다. 니편 내편 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를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적대 감정, 패거리 의식만 가지고 일을 하면 끼리끼리만 모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이가!’를 외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지킬 가치는 사라지고, 우리 편만 가르는 현실은 미래를 암울하게 합니다. 자기편을 규합하기 위해서 분열을 야기하여 국가의 하나 됨을 방해하며, 함부로 떠드는 사람은 리더가 되면 안됩니다. 리더는 하나 됨을 이루는 자질을 가져야 합니다. 밝은 미래를 열어 보일 비전을 제시하면 됩니다. 어려운 시절에 나라를 니편 내편 적을 만들어서 유익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공동체를 위하는 방식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방식 위에, 공동체를 위한다는 큰 가치가 동일하다면 서로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존중이 있을 때에 큰 틀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어려운 시대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12:18) 오늘 모두가 성경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가 만일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면, 편견을 버리고 소중하게 여기세요.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기뻐하시며, 덤으로 그와 같은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만남의 축복들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성숙한 공동체는 다윗의 왕국처럼 강하게 될 것입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4-03-20
  • 목회단상 > 가시가 사랑의 흔적이 되다.
      장윤석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새벽에 알람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키는 절차는 매번 힘이 듭니다. 일단 핸드폰으로 찬양을 틀어놓고, 한참을 침대에서 누운 채로 운동하며 아쉬운 잠을 몰아냅니다. 요즘은 주로 사순 절기 찬양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흔적들을 묵상할 때마다 큰 은혜가 됩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의 흔적이 지나온 내 삶의 역경을 이겨내도록 하는 능력이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프랑스 개신교인을 ‘위그노’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파리 비스콘티(Visconti) 거리에 프랑스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세웠습니다.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매의 날, 카톨릭 성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개신교인들에 대한 대학살이 시작됩니다. 사흘 동안 파리에선 3천 명, 프랑스 전역에는 3만 명 넘는 위그노가 학살당합니다. 파리의 개신교회는 이날 이후로 대학살의 신호였던 종소리를 생각하며, 교회에서 종을 울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상을 의학적 용어로 ‘트라우마(Trauma)’라 합니다. 재난 후 생기는 심리적 상처이지요. 누구에게나 이런 트라우마(상처)가 있습니다.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도 육체를 찌르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육체의 가시가 생활 속에서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사역에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그 육체의 질병을 ‘사탄의 사자’로 표현했습니다. 그 아픈 증세가 나타나기만 하면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치료받기 위해서 세 차례나 작정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응답은 이렇습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12:9) 예수님의 응답은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식과 열정과 동역자 등 더 많은 은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응답은 육체에 가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응답입니다. 육체의 가시가 바울을 겸손하게 만드는 도구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겸손해지면 은혜가 유지되고, 더 귀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높여주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도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9) 라고 고백하며 약한 것들이 도리어 그리스도의 능력임을 선포했습니다. 십자가는 약한 것이 능력이 되는 대표적 사건입니다. 고난과 수치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능력과 구원과 사랑의 십자가로 바꾸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가시는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가시를 은혜의 흔적으로 만드십니다. 그 흔적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흔적입니다. 지난날 저의 삶의 가시와 같았던 약함을 생각해 보면, 정말 그 모든 약함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의 흔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닌 육체의 가시, 트라우마, 삶의 고통과 아픔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가시’를 ‘십자가 사랑의 흔적’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사순절을 지나면서, 찬양을 듣든지,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드리든지, 말씀을 듣든지, 경건한 독서를 하든지,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자신에게 모아 보세요. 특별히 아프게 하는 ‘가시’가 십자가 사랑의 흔적이 될 때까지! 그때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보며 예수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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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3-13
  • 목회단상 > 신앙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장윤석목사(하늘사랑교회)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하루를 기도로 시작합니다. 교회도 열심히 다니며 하나님과 이웃을 섬깁니다. 밤이 되면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재리에 밝은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 이익이 되는 곳이 어디인지를 살피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돈을 버는 일에는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저녁이 되면 자기의 육체적 즐거움을 위해 돈을 씁니다. 두 사람이 강에 들어가 고기를 잡았습니다. 누가 고기를 더 많이 잡았을까요? 재리에 밝은 사람이 훨씬 더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고기는 기도로 잡는 것이 아니라 기술로 잡는 것입니다. 재리에 밝은 사람은 고기를 잡기 위해 물살이 어떠한지, 어디에 고기가 많이 모이는지, 어떤 미끼를 써야 하는지를 부지런히 살폈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고기가 자신의 그물로 들어오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기도는 신앙의 문제이고, 고기잡이는 기술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좋은 사람보다는 기술이 좋은 사람이 고기를 잘 잡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은 신앙이 좋은 사람보다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을 요구합니다. 학생이 좋은 성적을 얻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기도만 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신앙은 깊어지겠지만 성적은 안 나옵니다. 기도는 신앙의 문제이고, 성적은 기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바른 신앙은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기술도 경시하지 않습니다. 신앙으로 열심히 기도했으면, 기도한 방향대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기도만 하고 일을 안 하거나 일을 잘하지 못하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기도만 하고 사과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는 신앙에 대하여 성경은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6:7)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창조의 질서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은 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공부 잘하고 싶으면,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기도로 공부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돈을 벌고 싶다면, 돈 버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일을 열심히 잘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신앙이 없이 일만 열심히 하면 육체의 열매만 거둘 뿐이지만, 신앙으로 열심히 일하면 성령의 열매, 영생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6:8)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은 일하는 사람 중에 역사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열심히 일하여 뭔가를 이룬 후에는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이룬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유지하고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겸손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겸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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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4-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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