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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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목회단상 기사

  • 목회단상> 어머니의 편지
    임태주 작가의 <그토록 붉은 사랑>이라는 산문집에 나오는 <어머니의 편지>라는 글입니다. 시인의 어머니가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발견한 편지랍니다.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 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천국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 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중간 생략) 내용 중에는 이장 집 잔치에 일하러 갔을 때 다른 엄마는 주인 몰래 자신의 새끼들을 불러 음식을 챙겨 먹였는데 시인의 어머니는 그것은 도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자식에게 먹이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왜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처럼 먹을 것을 주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자신의 도리는 다했지만, 자식의 마음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음식을 챙겨주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제 마지막 단락을 소개합니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 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 같고,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의 이야기 같아서 이 글이 좋습니다. 저의 젊은 추억 속에도 삐뚤삐뚤 철자 틀린 어머니의 낡은 손편지가 생생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이나 주님의 사랑이나 어찌 그리 붉은지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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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5-11
  • 목회단상> 자물쇠와 열쇠 중 누가 이기나?
    자물쇠는 꼼짝 못 하고 갇히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자물쇠는 가져가지 못하게 하거나 무언가를 못하게 하는 것이지요. 무엇인가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반면 열쇠의 힘은 잠겨진 것을 여는 데 있습니다. 열쇠는 무언가를 풀고 잘 되게 하는 겁니다. 막힌 것을 뚫고, 묶인 것을 풀고, 꼬인 것을 해결해주고, 잘 되게 해주는 것입니다. 굉장히 긍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자물쇠의 힘과 열쇠의 힘이 충돌하면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열쇠가 이깁니다. 자물쇠로 아무리 잠가놓아도 열쇠만 있으면 다 열 수 있으니까요. 세상의 사람들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자물쇠의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답답하게 가두어 놓는 사람입니다. 일을 망쳐 놓는 사람입니다.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남을 헐뜯고 비방하기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은 역사의 진보를 막습니다. 사탄은 자물쇠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모든 것을 허물고 가로막고 갈라놓고 무너뜨리고 넘어지게 하고 실패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도 자물쇠의 은사를 가졌습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열쇠의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닫힌 것을 열어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가면 일이 풀립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움직이게 합니다. 이런 사람은 선한 역사를 열어갑니다. 만능열쇠의 은사를 가지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 없는 그가 이르시되” (계3:7) 죄로 인하여 세상 모든 사람은 죽음(사망)이라는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의 자물쇠를 풀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열쇠를 이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 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 음부는 지옥입니다. 지옥의 권세는 사람들을 꿀떡꿀떡 삼켜 버립니다. 지옥이 사람을 삼킨 다음에 문이 쾅 닫히면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지옥에 갇히지 않고 천국을 여는 열쇠를 받았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살면서도 열쇠의 권세를 가졌습니다. 허물어진 것을 다시 세웁니다. 묶인 것을 풀어줍니다. 갈라진 것을 합하게 합니다. 무너진 것을 다시 쌓아 올립니다. 실패했지만 또다시 시도하게 합니다. 떨어졌지만 나중에는 붙게 만듭니다. 이게 열쇠의 권세입니다.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이 땅에서도 복된 말씀이고, 하늘에서도 복된 말씀입니다. 여러분과 가족들이 하시는 일들이 이 열쇠로 열리는 형통이 있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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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4-27
  • 목회단상> 꽃을 보며 예수님 생각하다.
    매주 주보의 작은 한 면을 채울 글을 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뭘 쓸까? 길가의 봄꽃을 보면서 예수님과 연결 지어 봅니다. 죽은 자에게 바칠 꽃을 들고 서 있는데   벌이 날아와 앉네 ‘조문’이라는 시의 내용입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저마다 꽃 한 송이씩을 들고 숙연히 조문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엉뚱하게 벌 한 마리가 날아와 꽃향기를 탐하더라는 내용입니다. 시의 짧은 한 부분 속에 농축된 의미가 뭘까요? 저는 꺾여진 한 송이 꽃조차 생명을 부르고 있음에 감격합니다. 꼭 십자가의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꺾여진 꽃과 같은 우리 예수님. 그분이 생각납니다. 한편 벌은 누군가의 죽음조차도 탐욕의 기회로 삼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보는 듯합니다. 해마다 고난주간이 있는 이맘때 즈음에는 진달래꽃이 만발합니다. 교회 뒷동산을 오르는 길목에 진달래가 피고 있습니다. 진달래는 “내가 진다고 할래”라고 해서 진달래라고 한답니다. 진달래는 아무도 지려고 하지 않는 추운 겨울을 짊어지는 꽃입니다. 그래서 ‘먼저’ 지는 꽃입니다. 봄꽃이 져야 여름이 오고, 꽃이 져야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기에 진달래는 아름다운 선홍색 꽃잎을 떨궈 버리고 한 알의 밀알로 먼저 지고 맙니다. 예수님의 꽃은 진달래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인생의 짐, 인류의 죄 짐을 다 짊어지고 돌아가셨습니다. 진달래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보혈을 연상하게 합니다. 붉은 그 빛은 사랑의 빛입니다. 진달래를 보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합니다. 먼저 진 진달래가 찬란한 여름을 이끌어오듯,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진달래는 부활의 꽃입니다. 누군가의 진달래 예찬입니다. 봄마다 죽는 꽃이 있기에 찬란한 여름이 오나니, 먼저 지고 죽는 십자가의 꽃,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의 꽃, 진달래! 들에 잠시 피었다 지는 꽃잎 하나도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세상만사를 우연의 산물로 생각합니다. 우연히 세상에 와서 살 만큼 살다가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만남도 사건도 모두 ‘어쩌다 보니’ 생긴 일들입니다. 그의 인생의 우연들을 연결하는 일관된 목적의 실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삶을 ‘하나님의 목적=구원’이라는 일관된 하나의 실로 연결된 하나님의 서사로 봅니다. 생명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고, 인생은 천국을 향하여 가는 여정이며, 그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세상만사는 모두 의미가 있고 일관된 뜻(목적)이 있습니다. 봄꽃 하나까지도!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알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여서 길을 찾아가야 합니다. 진달래 피는 봄, 고난주간을 앞두고, 날 구원하신 예수님과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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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4-13
  • 목회단상> 사랑 이야기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사랑’입니다. 제일 위대한 것도 ‘사랑’입니다. 제일 가치 있고, 제일 아름다운 것도 ‘사랑’입니다. 코로나에 걸리면 기침을 참기 어렵듯이, 사랑은 참지 못합니다. 흠모하는 누군가와 사랑하여 ‘애인’이 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1.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줄 선물을 골랐습니다. 고운 머리카락을 빗을 예쁜 빗과 아름다운 모습을 비출 작은 거울을 샀습니다. 돈이 없었던 남편은 오래된 손목시계를 팔아 아내의 선물을 산 것입니다. 같은 시간 아내는 고운 머리카락을 잘라서 판 돈으로 남편의 낡은 시곗줄을 교체할 시곗줄을 샀습니다. 저녁에 만난 가난한 부부는 식사와 함께 서로 준비한 선물을 사랑과 존경의 표시로 나누었습니다. 아~! 머리를 스카프로 가린 아내의 모습, 시계가 없는 남편의 팔. 가난한 부부는 선물을 펼침과 동시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 헨리의 소설 ‘크리스마스의 선물’ 내용이죠. 사랑하기에 자신들의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희생하여 준비한 선물, 고귀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사랑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시계나 머리카락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여 주셨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사건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2. 역시 가난한 부부가 있습니다. 남자는 하급 공무원, 여자의 최대의 꿈은 화려한 파티에 가서 멋진 드레스를 입고 춤추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파티의 초대권을 구했습니다. 남편의 몇 달 치 월급으로 드레스를 맞추고, 어울리는 목걸이도 친구에게 빌렸습니다. 드디어 여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서 신나게 춤을 춥니다. 파티가 끝나고 문제가 생겼습니다. 빌린 진주 목걸이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부부는 똑같은 진주 목걸이를 구입하여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그 빚을 갚느라 사람답게 살지 못했습니다. 훗날 잃어버렸던 목걸이가 가짜였음을 알게 됩니다. 이 부부는 가짜 목걸이에 20년 인생을 허비한 것입니다. 모파상의 소설 ‘목걸이’의 내용입니다. 가짜 행복, 가짜 사랑도 있습니다. 20년 후에 깨닫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진짜 행복, 진짜 사랑, 속이지 않는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3. 농구의 명문, 미국 네바다 주립대와 한 대학 사이에 농구 시합이 벌어졌습니다. 경기장에는 관중들로 가득 찼습니다. 전반전이 끝나고 잠시 휴식 시간이 되었을 때, 관중석 한쪽 구석에서 갑자기 하얀 천이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펼쳐진 크고 하얀 천에는 커다란 글씨가 적혀있었습니다. “수잔! will you marry me?” 어느 남학생이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친구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청혼하는 극적인 장면이었습니다. 그때 어느 구석에선가 “Say, yes!”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조금 뒤, 관중들은 “Say yes”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뒤 어디선가 “yes. I will.”하고 한 여성이 일어서서 대답했습니다. 그곳의 관중들은 기립하여서 뜨겁게 박수를 보내며 축하했습니다. 멋있지요? 오늘 나에게도 이보다 더 진한 감동으로 프러포즈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여 십자가에서 손 내미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사랑의 손을 붙잡길 바랍니다. 사순절, 십자가 사랑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서 예수님과 더 깊은 사랑에 빠질 수 있길 기대합니다. 사랑하면 행복합니다. 예뻐지고 멋져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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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3-30
  • 목회단상 > 죄 안 짓게 만들 수 없었나요?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죄를 짓도록 했나요. 왜 인간의 범죄를 허용하셨나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아예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들면 되지 않았나요.” 초신자들(?)이 자주 하는 질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지 않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면 됩니다. 로봇은 입력된 명령대로만 움직입니다. 로봇에게 생명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형상의 핵심은 인격입니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인격성. 이것을 자유의지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자유롭게 경배하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있습니다. 성경 공부를 하면서 흔히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줄 알았으면서 왜 자유의지를 주셨는가.” 사실 자유의지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와 같습니다.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됨에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자유의지는 부엌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대장장이가 부엌칼을 만든 목적은 요리를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그 칼은 요리에 사용될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상해를 입힐 수 있는 가능성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 칼의 부정적 가능성 때문에 요리사에게 칼을 주지 않는다면 요리를 할 수 없겠죠. 요리사의 칼보다 더 귀중하고 필수적인 요소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입니다. 따라서 인간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유의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잘 사용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자유의지의 오용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무시하고 억지로 하나님을 믿게 하거나 순종하게 만든다면 이는 인간의 참된 가치를 말살하는 비인격적 행위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까지 허락하심으로써 인간을 존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도록 선악과라는 함정을 파고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롭고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깊이 사귐을 가질 수 있도록 인간을 존중해 주셨고 깊이 배려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귀한 자유의지를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항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을 한 인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전 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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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3-07
  • 목회단상 > 사이다 발언을 조심하라
    어느 초등학교 시험문제 ‘삶은 달걀은 OO를 치며 먹는다’에 한 학생이 ‘가슴’을 치며 먹는다고 답을 썼다고 합니다. 삶은 달걀이나 고구마를 먹다가 목이 메어 답답할 때는 톡 쏘는 사이다가 최고입니다. 속이 더부룩하고 체한 듯 거북할 때도 사이다 한 잔 마신 후 큰 트림 한 번 하며 ‘어~시원하다’ 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답답할 때 누군가 속이 시원한 말을 하면 ‘사이다’ 혹은 ‘핵 사이다’ 발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나 폴리페서들은 ‘사이다 발언’으로 여론의 눈길을 끌기도 하고 인기를 누리기도 합니다. 장관을 지낸 어떤 분도 교수 시절부터 SNS를 통해 던진 사이다 발언으로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모은 SNS 스타였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들은 옳은 말입니다. 정의롭고 멋진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들이 부메랑이 되어 그분에게 다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이를 보면서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참 무섭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이다 발언의 특징은 상대방을 확실히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잘못은 했지만, 상황을 보니 이해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말해선 사이다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나 자신도 돌아보자’라는 식의 발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 나쁘다, 틀렸다고 딱 잘라 말해야 합니다. 그것도 통쾌하게. 이게 사이다 발언의 정석입니다.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 때문에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의 마음이 그 순간 시원해지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힘이 있어서 아무나 상대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사이다는 더 시원해집니다.  그러나 사이다 발언의 남용은 흑백논리를 부추기고 대립과 갈등을 조장합니다. 정치 이념적 색채를 띤 집회에는 이런 사이다 발언이 넘쳐납니다. 여기에 종교인들이 가세하여 하나님의 신성한 뜻이라고 한다손 치면 거의 사이다 중독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사이다는 결국은 설탕물입니다. 톡톡 쏘며 거품이 나는 탄산이며 딱 그때뿐입니다. 많이 마시면 오히려 건강을 해칩니다. 말하는 사람도 문제이지만 듣고 손뼉 쳐 주는 것도 문제입니다.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겁니다. 선거철이 다가옵니다. 온갖 종류의 사이다 발언들이 넘쳐납니다.    이때, 교단은 오염되면 안 됩니다. 유튜브에 들어가면 대형교회 유명 설교자로부터 심지어 검증되지 않은 분들의 사이다식 설교는 넘쳐납니다. 사이다는 삶은 달걀이나 찐 고구마 먹을 때에나 좋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많이 마시면 병납니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듣는 말씀이 가장 건강하고 자신을 자라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곳엔 설탕물 아닌 눈물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린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을 하는 것도 듣는 것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특히 남을 비판할 땐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남의 허물을 보기 전에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보라는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자기를 살피는 거울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너무나 현명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함부로 남을 비판하지 말고 특히나 공동체를 허무는 말은 삼가야 합니다. 가장 안전한 말은 믿음의 말입니다. 사랑의 언어가 사람과 공동체를 살리고 변화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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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2-16
  • 긴 연휴 뒤, 출근길이 즐거우신가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곳은 어디일까요? 대부분 자신이 일하는 직장입니다. 이 말은 삶이 행복하려면, 일하는 것도 행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즐거워야 할 일이 고통이 되고,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노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타락의 영향이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 노동은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행복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시고, 구원의 즐거움을 노동으로까지 확장하여 사람이 하는 일의 소중함과 즐거움을 회복하길 원하십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일은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입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고전 10:31) 일이 곧 삶이고 예배입니다. 이와 같은 기독교 신앙의 노동관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저는 폴 마샬의 “천국만이 내 집은 아닙니다.”라는 책에서 시어벨트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우리 아버지는 생선 장수다. 가게는 작았고, 그 가게 안에 비린내가 가득했다. 나는 어느 목요일 정오를 기억한다. 아버지는 부유한 한 여인에게 커다란 잉어 한 마리를 팔고 있었다. 잉어가 신선하다는 사실을 그 부인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한판의 전쟁이었다. 생선을 여기저기 자신감 있게 보여주었고, 가격도 정직했다. 아버지는 계산대 위에 물고기를 올려놓고, “좋습니다. 좋아요. 손질해 드릴까요?” 그 부유한 여인은 동의하면서 거래가 이루어지는 방식에 찬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런, 당신은 부르심을 놓치지 않았군요! 정말 이 직업이 제격입니다.” 여인의 말은 진실이었다. 아버지는 생선 장사를 하면서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왕이신 주님께 전적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그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그 사실을 느낄 수 있다. 그 가게는 사람들이 미소를 지으면서 질 좋은 생선을 살 수 있는 깨끗하고 정직한 장소일 뿐 아니라, 거기엔 어떤 분위기가 있다. 그 분위기는 구경꾼들에게도 유쾌함을 주는, 사고파는 거래 속에 담겨 있는 웃음과 재미와 즐거움이다. 나는 아버지의 두툼한 두 손을 바라본다. 손가락 굵기는 내 손가락의 거의 두 배나 된다. 그 손으로 결코 피아노를 칠 수는 없지만, 그 두 손이 고등어 배를 예리하게 반으로 가를 때, 늘 신앙 안에서 성스럽게 주님 앞에서 생선을 토막 냈다는 것을 알 때,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 사내의 손 위에 그리고 거친 생선 칼의 섬광 위에 내려앉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원리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기며 사용한 또 하나의 원리는 ‘만인 제사장의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하는 일도 교회의 일처럼 거룩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원리였습니다. 세상의 일도 예배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만인 제사장의 원리입니다. 마틴 루터는 구두 수선공의 일은 주교나 사제의 일과 동일하게 성스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만인 제사장으로서 직장의 일까지도 구원하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하는 우리의 일은 거룩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이 됩니다. 일터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소명의 자리입니다. 긴 명절을 지내고 출근하시는 발걸음이 가볍고 즐겁게 되길 기원합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02-09
  • 목회단상 > 역경의 시대… 믿음의 쿠션을 가지라
    쿠션은 마찰의 충격을 줄이는 장치입니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 속에 쿠션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컨대 욕을 들었습니다. 자극이 온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바로 욕이 나가면 그건 쿠션 없이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잠시 생각하며 여유를 가지고 반응을 보이면 쿠션을 통과한 반응입니다.  역경도 인생의 자극입니다. 자극이 올 때 하나님께 대해서는 “왜 하필 내게?”, 타인에게는 원망, 불평, 분노, “네가 뭔데?”, 자신에 대해서는 절망, “나는 안돼!”라며 이미 넘어진 자신을 밟아버리기 쉽습니다. 이렇게 쿠션 없이 감정에 이끌려가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삶이 피폐해집니다. 가족들도 그 사람 때문에 피폐해지고, 사회를 황폐하게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자극이 올 때 넓고 푹신한 쿠션을 통해 반응을 보이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역경의 자극이 올 때 그만큼 쿠션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 쿠션이 있나요? 쿠션의 성능이 좋을수록 성숙한 사람입니다. 가장 성능이 뛰어난 쿠션은 “믿음의 쿠션”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1:2-4) 역경의 자극을 받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그 시련을 통해 유익을 볼 수도,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시험을 잘 치면 대학도 가고, 취직도 합니다. 시험을 잘 치면 온전하고 구비하여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영적인 영웅도 시련을 통과할 때 만들어집니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시련이 와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나 만드는 현실이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니 감사합니다.’라며 인내한다면 믿음의 수능 고사 최고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조신영 씨의 <쿠션>이란 책이 있습니다. 책 속 주인공 이름은 한바로입니다. 이름대로 자극에 바로 반응하는 캐릭터입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스펀지를 개발한 재벌인데, 손자 바로에게 유산을 물려주기 위하여, 그 유산을 받을 수 있는 실력 있는 사람이 되도록 미션을 주어서 푸는 과정이 그 책의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그 문제를 풀어가면서 ‘바로’가 아니라 큰마음의 공간(쿠션)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냥 축복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을 만드십니다. 어떤 복을 주셔도 겸손히 감당할 수 있는 그릇으로요. 또 어떤 일을 맡겨도 잘 감당할 수 있는 온전한 사람 만드는 일에 하나님은 열심입니다. 우리에게 당한 여러 가지 역경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스펀지(쿠션)는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을 신뢰하는 온전한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룹니다. 어떤 시련이 와도, 자신 실력 키우는 기회로 삼으며 기쁨을 잃지 않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좋은 미래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역경의 과정에서 기적도 베푸시며, 역전의 짜릿한 기쁨을 맛보게도 하십니다. 이 믿음이 가장 좋은 쿠션입니다. 역경의 시대, 믿음의 푹신한 쿠션을 가슴에 품게 되길 기원합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01-26
  • 목회단상 > 역경의 시대 - 서로 위로하라
    남편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누가 내게 천사의 존재를 믿느냐고 묻길래, 확실히 믿는다고 했어”. 아내는 “왜 그렇게 생각해?”라고 물었습니다. 남편의 대답이 멋집니다. “여기 한 명 있으니까”. 이렇게 부부가 서로 위로하며 힘든 시기도 극복해 나가야 하죠. 요즘 천사는 야단도 잘 치지만 천사는 천사입니다.  몸의 병으로 아픈 분도 있지만, 마음에 상처를 입은 분들은 더 많습니다. 몸에 상처가 생기면 약 바르고 치료하듯이, 마음의 상처도 위로의 약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힘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위로의 약이 필요한 분들이 많습니다. 어디서 위로받고 상한 마음을 치유 받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위로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도 사람들을 위로하십니다. 경치 좋은 자연 속을 거닐면 힐링이 되지요. 그 이유는 자연 속에 창조주의 성품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생존을 위해 오곡백과뿐만 아니라 꽃도 지으셨습니다. 그 꽃을 보며 위로받으라고요. 또 누군가를 찾아가서 위로하라고요. 이제 추운 겨울날 눈이 오면 함박눈을 맞으며 창조주의 위로를 느껴 보세요.    하나님은 더 확실한 위로를 말씀을 통하여 주십니다. 성경을 읽으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음과 불행을 경험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다면 교육을 받아도, 환경을 바꾸어도 죄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값을 다 치르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죄에서 해방되고 행복과 위로를 받길 원하십니다. 혹시 인생의 역경의 때를 지나며, 낙심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시편 42:5 말씀을 붙드십시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혹시 두려움이나 불안함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사야 41:10 말씀을 붙드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혹시 인생의 혹독한 외로움을 경험하고 계신 분이 있다면, 히브리서 13:5 말씀을 붙드십시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역경 중에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릴 위로하기를 원하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위로를 얻고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역경의 시대를 살고계신 여러분! 말씀을 읽고 들음으로 믿음을 가지시고, 그 믿음으로 서로 위로하며 역경의 시대를 함께 이겨나가길 기원합니다. 
    • 칼럼
    • 목회단상
    2022-01-19
  • 목회단상> 역경의 시기에는, 중심을 바로 잡으라
    오뚝이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섭니다. 그 이유는 바닥에 무게중심(쇠뭉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치 오뚜기와 같습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삶의 중심에 가장 귀하고 무거운 것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말씀으로 중심을 잡고 있으면 역경의 바람에 넘어졌다가도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이 없는 인생은 이리저리 날뛰다 넘어지면 절망, 포기, 실패로 끝나 버립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려지느니라(잠24:16) 성경이 말씀하는 의인은 실수나 실패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의인입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면 다시 일어섭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명보다 무게가 훨씬 가벼운 재물과 명예, 어떤 직위 등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그것을 의지하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언제든 역경의 바람이 불어오면 날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지성, 감정, 학벌, 인생의 경험조차도 새털처럼 가벼워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 삶을 중심 잡고 지탱하려고 하면 생명보다 가치 있고 무거운 것이어야 합니다. 생명보다 귀한 존재는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역경의 바람이 불어올 때는 중심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 역경의 시간은 교회가 중심을 바로잡는 시기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려워도, 세상에 대한 신뢰를 잃을수록 교회는 중심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본주의, 물량주의, 세속주의 중심이었다면 중심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중심만 바로 잡는다면 세상이 어려울수록, 교회는 일어나 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역경의 바람에 지치고 상한 사람들을 끌어안고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한계에 부딪혀 절망하는 분들에게 구원의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아브람 링컨은 중요한 도전에 27번 실패했다가 28번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완전 오뚜기입니다. 그의 삶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유품으로 남긴 성경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삶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그 많은 실패를 경험하고도 중심 잡고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큰 그림을 그의 삶으로 그렸습니다. 중심을 바로 잡는 것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역경 속이라도 하나님과 말씀으로 중심 잡고 서면, 하나님께서 역경을 돌파하며 나갈 길을 여십니다. 역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실패도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도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인간이 범죄한 후에 땅이 엉겅퀴와 가시를 내게 되었습니다. 엉겅퀴와 가시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 엉겅퀴가 간에 좋아서 약재료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찔레(가시)도 그 속에서 신경안정 물질이 추출되어 약이 된다고 합니다. 중동의 사막은 죽은 땅입니다. 그러나 파보니 석유가 펑펑 나왔습니다. 대박입니다. 하나님은 엉겅퀴와 찔레도 약이 되게 하십니다.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아도 중심을 바꾸면 삶이 달라집니다. 지금 삶을 지탱하고 있는 중심이 무엇입니까? 바람 불면 날아갈 수 있는 것을 삶의 중심에 두고 있다면 중심을 바꾸세요. 2022년 한 해를 시작하며, 하나님과 말씀으로 중심 잡고 출발합시다. 비록 역경의 시간이라도 돌파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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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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