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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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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7-13

실시간 목회단상 기사

  • 목회단상 > 믿음의 사람이여 희망을 품어라!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아름답고 밝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이상주의자, 낭만주의자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 바라보고 땀 흘리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현실주의자라고 합니다. 현실의 높은 벽에 절망하며, 세상이 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조차 의심하고 게을리하는 사람을 회의주의자, 허무주의자, 염세주의자라고 합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많이 경험할수록 이런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세계는 한때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신봉하며 머잖아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1, 2차 세계 대전과 경제 대공황을 겪으면서 그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러면서 회의주의자, 허무주의자들이 많아졌습니다. 20세기 후반 경제발전과 세계화 시대가 열리면서, 다시 인간의 교만은 머리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 사상적 배후에는 포스터 모던이라는 사조가 있는데, 이 사조의 뿌리는 철저한 인본주의입니다. 절대 진리, 절대자, 절대 규범 이런 것을 부정하며,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자유 인권의 미명하에 권위와 규범을 해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인류의 교만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다시 깨어지고 있습니다. 세계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살아보려고 하는 열심조차도 소용없는 오늘, 팬데믹 시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다시 회의주의, 허무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이런 부정적인 현상에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속속 포기하고 있습니다.   옛날 6.25 전쟁의 폐허 더미 속에서도, 사람들은 천막 교회에 나아와서 기도하며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서 그 어려운 시절을 극복했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었고, 신앙은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그러나 2022년의 세상은 교회를 희망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를 향한 온갖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전과 같이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이 조심스럽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상황은 6.25 전쟁 이후 나라 전체가 폐허가 되어버렸던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도 절망하고 포기해야 합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성경에는 언제나 희망이 가득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 그 속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성경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 곧 비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우린 현실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계신 것을 믿고, 그가 상 주심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희망 가득한 꿈을 그리고 기도하며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희망이 이 땅의 모든 성도의 얼굴과 삶의 태도로 나타난다면 교회는 다시 세상의 희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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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7-20
  •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교회
    교회 주보를 보면, 혼사와 장례 소식이 실립니다. 요즘은 혼사보다 장례 소식이 주보에 더 많이 실립니다. 인구추세로 보면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는 성도의 가정이 슬픔을 당할 때면 목사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더 많은 인원의 교인들이 장례예배에 참여한다면 더 큰 위로와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소수정예(?)로 가서 예배드릴 때가 많았지만 마음만큼은 정성을 다하여 섬겼습니다. 지난 주간은 장례가 두 군데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한군데는 전라남도 곡성, 또 한군데는 강릉이었습니다. 곡성은 부교역자님과 청년들이 가고, 강릉은 제가 가서 장례를 집례하였습니다. 장례 기간 국토의 동서를 두 번 횡단하며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많은 분이 한마음으로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슬픔을 당한 지체를 위로하는 모습에 개척 교회 때를 떠올리며 새삼 감사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났습니다. 장례식장을 드나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면 어떨까?’ 요즘은 교회에서 교인의 결혼식을 치르는 것도 흔치 않아 보입니다. 최근 재벌가의 결혼식을 정동교회에서 올린 것이 뉴스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교인 집안의 결혼식은 대부분 교회에서 올렸고 당사자들도 충분한 시간 활용 및 신앙의 이유로 만족했었습니다. 좋은 전통은 다시 살려 나가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장례예배도 자신이 몸담고 섬겼던 교회에서 드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제가 알기로는 공로가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장례예배를 교회장으로 치르는 경우는 있지만, 평신도의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천주교는 성당 내 여건이 허락된다면 장례는 물론이고 성당 내 납골당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 대형 성당의 예입니다. 개신교인들은 평생 교회를 다녀도 죽어서는 교회를 떠나 병원 장례식장에서 3일을 보낸 후 떠납니다. 옆 빈소에서 들리는 타종교 예식, 곡소리, 향 냄새, 술 냄새, 심지어 화투 소리까지 어수선합니다. 예배드리는 한쪽 옆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하는 것도 거슬립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장례식을 생각해 본 것입니다. 물론 신학적인 지지, 제반 시설 등 현실적으로 타당한 조건을 갖추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조건만 된다면, 평소 천국 복음을 듣고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자신의 교회에서 천국 환송까지 한다면 좀 더 평안한 마음으로 임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도 있으며, 그로 인한 신앙적인 유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욱 유익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교회가 교인의 마지막 길까지 함께 한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야말로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축복받으며 출생해서 애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는 영적 가족의 정서가 진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인 예배를 드리는 예식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천국으로 환송하는 장례 공간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혼자만의 생각이고, 당장 실현할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어찌 되었든 교회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함께 하는 공동체임은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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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7-13
  • 목회단상> 생각하지 못한 은총이 있다.
    수십 년을 교회 섬겼으나 경제생활은 가난한 집사님이 있었다. 시골 노모가 10년간 모은 돈 400만 원을 사업자금 하라 보내주셨다. 사업자금으로 쓰려 했으나 십일조와 감사헌금과 남에게 진 빚 갚았다. 그리고 퇴원비 없어 퇴원 못 한 성도를 위해 구제비 모금함에 선뜻 내놓았다. 이렇게 귀한 돈 다 쓰이고 말았다.  그 주일날 부유한 집사님과 한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시간에 가난한 집사님은 부자 집사님 보고 서러워서 울고 부유한 집사님은 감사해서 울었다. 예배 후 부자 집사님이 가난한 집사님 손잡고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4천만 원 되는 가게 하나 전세로 얻는 것인데 동업자는 2천만 원 준비했으나 자신은 돈 없어 준비 못 했다고 말했다. 언제라도 형편 되면 갚으라며 그 자리에서 돈 빌려 드릴 테니 사업하라고 2천만 원을 주었다. 실로 가난한 그에게는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어렵게 산다 해도 주님의 말씀 따라 살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진실을 다 아시고 누구의 맘이라도 감동시켜 당신의 자녀들을 돕는다.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갖고 산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 어디서나 축복하신다. 사람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신다면 생각하지 못한 은총을 마련하신다. (고훈 목사님의 ‘목회일기’ 중에서 발췌)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 한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저 2장 9절 (새번역성경) 그렇게 저렇게 벌써 2022년 하프 타임에 다가왔습니다. 해마다 이맘때쯤 맥추감사절 예배로 떡도 하고 잔치를 했지만, 코로나 팬데믹 2년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위드 코로나’ 또는 ‘엔데믹’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방역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경제적 어려움에 부닥친 분도 계시겠지만, 분명한 주님의 음성이 마음에 또렷이 들려 옵니다. “그래도 감사하자!” “우짜든지 감사하자!”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은혜~은혜이다. 믿음으로 감사할 때 생각하지 못한 하나님의 은총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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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7-06
  • 목회단상>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의 소중함
    “꽃이 이렇게 곱게 피어 있는데 / 꽃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 우린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꽃의 아름다움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하는 말이겠죠. 한 송이 꽃을 보고 노래하는 작가나, 붓을 드는 화가가 느끼는 감동은 한 송이의 꽃을 피우기 위해 꽃이 견뎌내야만 했던 인고의 시간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살아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 내 삶에 당연한 것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우리는 무언가를 당연히 여기고 고마움을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상적인 것의 소중함을 생각지 못합니다. 만일 ‘당연하게 여겼던 소중한 것’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누구나 몇 가지는 떠오를 겁니다. 문제는 그 일상적인 것과 당연히 여겼던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점은 그것을 잃고 난 뒤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고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사람이 떠난 후에야 그 소중함을 깨닫기에 십상입니다. 때늦은 후회라고나 할까요. 당연히 늘 곁에 있을 줄 알았는데... 금요일 오후 긴급 기도요청 문자를 받았습니다. 오랜 친구 목사의 사모님이 수술 중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친구는 지금까지 시골교회를 목회하며 정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진실하고 성실한 목회자이지만, 타협이나 융통성이 없다 보니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아 사역지를 옮겨야 하는 아픔을 몇 번이나 겪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평소 몸이 약한 사모님이 겪는 마음의 상처와 스트레스가 컸나 봅니다. 목사님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새벽 1시면 일어나 기도합니다. 집에서 새벽까지 잠자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사모님이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그렇게 죄스러웠나 봅니다. 건강도 당연한 것으로 알고 건강검진 받는 시간이 아까워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모님도 암 3기가 지날 때까지 불편하셨겠지만 병원 한 번 가보지 않고, 갑자기 쓰러져 응급실로 가서 급하게 수술 했다고 하니, 그간의 고생에 마음이 저립니다.   토요일에야 연락이 닿아 통화를 하니, 늦게까지 수술을 마치고 경과를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전화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동안 정말 소중한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당연히 여겼음을 회개하며 치유를 구할 때, 저도 친구도 목이 메고 코끝이 시렸습니다. 친구 목사도 이제는 살아서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정말 소중히 여기며 살겠다고 말합니다. 친구야! 꽃이 이렇게 곱게 피었는데, 한 번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어디를 그렇게 빨리 달려갔었나! 그렇게 말하고 보니 꽃을 보지도 않고 어딘가로 막 달려가고 있는 또 한 사람이 낯이 익습니다. 잘 보세요.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 소중한 것을 당연히 여기다가 떠난 후에 후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 모두 다 소중합니다. 곁에 있어 더욱 소중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소중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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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6-29
  • 목회단상 > 신앙생활은 관계입니다.
    신앙생활은 종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둘째는 자신과의 관계이고, 그다음은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들이 좋으면 삶이 풍성해지며 행복합니다. 반대로 관계가 좋지 못하면 삶은 힘들고 불행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어린 생물들은 다 귀엽습니다. 강아지도 병아리도 예쁩니다. 하물며 사람은 어떨까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어린아이 때의 모습은 예쁩니다. 그래서 사회는 특별히 아이들을 배려하고 보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셨습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마음이란 “주여, 저는 연약합니다.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세요”라는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세리는 감히 고개를 못 들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세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고개를 들고 “저는 나쁜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다 잘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래, 니 잘났다.”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세리와 같은 자세로 설 때,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입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세리는 “의롭다 여김”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이 ‘의(헬, 디카이오스)’는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보호받고, 은혜를 입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자신과의 관계가 좋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죄책감과 열등감, 자학, 자기 연민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은 자신과의 좋은 관계를 훼손합니다. 자신을 용서치 못하고 하찮게 여기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이 보는 자신의 모습은 정확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도 정확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나, 하나님이 보시는 자신의 모습이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한 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보배롭고 존귀한 나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이웃과 좋은 관계 속에 살아야 삶이 풍성하며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가는 곳마다 싸움닭처럼 다투길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투며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다투며 많은 봉사를 해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물론 좋은 열매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을까요? 빌립보서 2:3 말씀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면 됩니다. 또 한 가지, 인색하지 않으면 좋은 관계를 맺습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이기적이고 계산이 밝습니다. 밥값 한 번 안냅니다. 자꾸 그러면 다음부터는 그를 부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관계가 좋아지려고 하면 지갑을 열면 됩니다. 하나님과 나와 이웃과의 좋은 관계 속에서 풍성하고 행복한 신앙생활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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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6-22
  •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하며
    지난 코로나 2년의 세월은 ‘숨 막히는 시간’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마스크 쓰기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예배 시간에도 물론 마스크를 착용합니다. 기독교 예배는 신앙고백, 기도, 찬송, 설교 등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당연히 마스크를 쓴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는 숨이 막힙니다. 날씨가 더워지면 더욱 답답합니다. 그것도 일상이 되니 적응이 된 듯합니다. 마음껏 숨 쉬며, 말할 수 있는 세상은 축복이었습니다. 마스크 착용 말고도, 코로나 이후 세상은 더욱 숨쉬기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작년에 미국에서 흑인 피의자가 백인 경찰에 의해 목이 눌린 상태로 ‘숨을 쉴 수 없다’라는 말을 반복하다가 숨이 막혀 죽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사건은 인종차별이라는 숨 막히는 미국의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습니다. 자유와 인권이라는 기독교 정신은 어디에 갔을까요? 곧이어 흑인들의 항의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그 시위는 방화와 약탈이라는 범죄로 바뀌었습니다. 특별히 교민들의 피해가 컸습니다. 건장한 흑인들이 동양인을 무차별 폭행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차별의 피해자가 차별의 가해자가 되며, 약탈과 폭력의 가해자가 되는 모순적인 현실을 보면서 숨이 막히고, 기가 막힙니다. 그 무렵 우리 사회에서는 계모에 의해서 여행용 가방 안에 아이가 몸을 접쳐서 갇혀 있다가 숨이 막혀 죽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히고 가슴 아픕니다. 정치 현실을 보나, 남북관계를 보나, 국제정세를 보나, 숨이 막힙니다. 최근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핵시설을 공격하고, 질소탱크를 폭발시키고, 민간인들까지 무차별 살상하는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보면서 숨이 막히고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코로나와 전쟁의 장기화로 인하여 세계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먹구름 아래에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경기 침체와 물가 급등,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인한 가계 부담의 짐은 더욱 숨이 막히게 합니다. 그 외에도 생각하면 노동의 현장에도, 교육의 현장에도, 심지어는 가정과 교회 안에서도 숨 막히는 일들은 너무 많습니다. 때로는 어떤 사람의 오해와 편견으로 가득한 말을 들을 때면 숨이 막힙니다.   이렇게 숨 막히는 세상이 된 것은 모두가 자기만을 위해 일방적으로 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19는 사회와 경제를 멈추게 했습니다. 멈출 수 없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멈출 때, 사람들은 인생의 본질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안식을 명하신 날입니다. 이날은 일을 멈추고 안식하며, 본질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영원의 시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자연과 현재 일들의 영적인 의미를 보게 됩니다. 쉼은 거칠어진 호흡을 가지런히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예배하며,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감동으로 호흡합니다. 그 호흡으로 또 다른 사람들을 숨 쉬게 하며,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거의 모든 방역 규제들이 다 풀렸습니다. 조금 더 편하게 숨 쉴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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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6-15
  • 목회단상> 커피생각 & 예수님 생각
    요즘 커피가 유행입니다. 어떤 경우는 식사비보다 식후에 마시는 커피 값이 더 나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동네만 해도 카페가 넘쳐납니다. 카페 거리가 형성될 정도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커피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나는 언제부터 커피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상가교회 있을 때, 커피 전도를 위해서 핸드드립을 배우면서 커피 맛을 조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은 때는 아이스커피 한 잔이면 머리까지 시원해집니다.  서브에 얼음 넣고 막 로스팅한 신선한 원두를 갈아서 핸드드립을 하면 뚝뚝 떨어지는 커피가 얼음을 타고 녹아내리면서 희석되고 그 고소한 향을 발산할 때면 시각도 후각도 호강합니다. 투명한 컵에 따르고 한 모금 머금으면 깨끗한 커피 향이 입 안 가득, 그리고 머리까지 맴도는 것 같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재벌도 부럽지 않습니다. 제가 커피를 마시며 이런 말을 하면 어떤 분들은 도저히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담뱃재 냄새 같다고 심술을 부리기도 합니다. 카페에 가면 여러 가지 커피가 있죠. 여러분은 어떤 커피를 주문하십니까? 연하게 마실까, 달콤한 걸 마실까, 차게 마실까 등 많은 선택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커피 종류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바로 에스프레소입니다. 양도 아주 적은 데다 진하고 써서 아무도 안 마실 것 같은 커피입니다. 그런데도 카페마다 에스프레소는 꼭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에스프레소가 모든 커피의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에스프레소에 따뜻한 물을 넣으면 아메리카노가 되고 따뜻한 우유를 부으면 카페라테가 됩니다. 여기에 우유 거품을 진하게 내서 계핏가루나 초콜릿 가루를 뿌리면 카푸치노가 되고 캐러멜시럽을 첨가하면 카라멜마키아토가 됩니다. 초콜릿 시럽을 넣으면 카페모카가 되고 그 외의 여러 가지 커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커피의 기본인 에스프레소는 ‘커피의 심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생각해 보니 교우님들 중에는 바리스타도 계시고, 카페를 운영하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네요. 그래서 다시 목사로 돌아와 주제를 바꾸어 봅니다. ‘믿음의 심장’은 무엇일까요? 빠질 수 없고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은 예수님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자랑도, 헌신도, 충성도 예수님에게서 나와야 합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우리의 심장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죽습니다. 예수님이 있으시면 삽니다. 심장 맞습니다.   어디에 서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더욱 예수님을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언제까지요?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사시며 일하심을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내 모든 믿음의 근원이며 중심이신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갈망합니다. 오늘부터 교회 카페 사역을 시작합니다. 카페 이름은 플랫폼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잇는 플랫폼, 성도와 성도 사이를 잇는 플랫폼, 교회와 이웃을 잇는 사랑의 플랫폼이 되길 기도해 주세요. 커피 향 가득한 공간에서 은혜를 나누고 행복이 배가 되길 기도해 주세요. 오늘 주일도 커피 향기 & 예수님 향기 가득하여 행복한 날이 되길 기대합니다.     장윤석 ( 하늘사랑의 교회 담임목사)            
    • 칼럼
    • 목회단상
    2022-06-08
  • 목회단상 > 만남과 이별을 대하며
          만남과 이별을 대하며 새 가족 등록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만남이 많다는 것은 목사로서 행복입니다. 가수 노사연 씨의 ‘만남’이란 노래 속에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솔직히 가사가 여기까지 밖에 기억이 안 나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만남 속에 우연은 없습니다. 만남 속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우린 부모님과의 최초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누군가를 만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죽고 난 후에 눈을 뜰 때, 영원한 존재들과 새로운 차원의 만남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만남은 설렘으로부터 시작되지만, 만남 뒤에는 이별이라는 그림자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우릴 아프게 합니다. 부모도,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사랑하는 연인과의 만남도 예외는 아닙니다. 살면서 만남과 이별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낯선 사람이나 환경을 처음 대할 때 지나치게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지나친 애착으로 이별을 감당치 못해서도 안 됩니다. 만남과 이별에 너무 무관심해도 안 되고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되기에 우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전제는 만남과 이별 속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기대가 됩니다. 때로는 따뜻한 말 한마디로도 만남의 축복을 누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만남이 축복되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하고 노력이 뒤따라야 하고 투자해야 합니다. 무관심과 이기심은 불행한 이별을 낳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이별도 있지만 대부분의 이별은 노력의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멀리서 사는 친척이나 친구와 전화 한 통 없이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면 결국 멀어지고 만남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이별 속에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에 반드시 손해만은 아닙니다. 이별은 아쉽지만,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준비이며 서로를 위한 하나님의 선이기에 축복하며 보낼 수가 있습니다. 살면서 누구에게나 만남이 축복되고, 이별이 상처를 남기지 않도록 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보다 야망을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만남은 언제나 설레고 행복했지만, 이별은 언제나 아팠습니다. 만남과 이별이 반복될수록 그런 감정이 무뎌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도 만남은 행복하고, 이별은 아쉽고 아픈 것은 아직 미숙해서일까요? 그래서 나름 터득한 방법이 있다면, 헤어질 때 인사를 잘하는 것입니다. “어딜 가든 하나님과 동행하세요” "그리고. “다시 만나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큰 복은 없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는 두 번의 교회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이별이라 아팠고, 또 다른 사정으로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헤어지는 인사를 잘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그곳에서 다시 만납시다” 참석한 교우들과 함께 찬송도 불렀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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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5-31
  • 목회단상> 부모 사랑’, ‘부부 사랑’, ‘자녀 사랑’ 중 어느 사랑이 우선일까요?
    ‘닭이 먼저일까요, 달걀이 먼저일까요?’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질문입니다. 닭이나 달걀이나 순환론적이기에 답이 없는 우문(愚問)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는 닭이 먼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닭을 먼저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어리석은 물음을 해보겠습니다. ‘부부 사랑이 먼저일까요, 부모공경이 먼저일까요, 아니면 자식 사랑이 먼저일까요?’ 역시 성경을 힌트로 답을 찾는다면, 부부 사랑이 먼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부모가 있기 전에, 자식이 있기 전에 먼저 부부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건강한 부부 사랑이 있을 때, 위에 계신 부모님 공경과 자녀 양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옛말에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처갓집 말뚝도 귀하게 보인다는 말이 있지요. 아내가 사랑스러우면 장인 장모님이 존경스럽고, 아내 닮아 태어난 자녀들도 사랑스럽습니다. 같은 원리로 남편이 좋으면 이런 남편을 낳아 길러주신 시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할 것입니다. 남편을 빼닮은 자녀들이 사랑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 사랑에 금이 간다면, 장인 장모도, 시부모님도, 자식들도 정성 다해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부부 사랑이 아름답게 꽃피는 집의 자녀들은 결혼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부부애가 깨어진 집의 자녀들은 결혼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님 공경도 즐거움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남편에게 순종해 보세요. 남편이 친정 부모님을 즐거움으로 돌보게 될 것입니다. 자식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부부 사랑은 부모 사랑보다 우선이고, 자녀 사랑보다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세요. 사랑에 순서를 매겨서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부부 사랑이 위로 아래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기본이 된다는 말입니다. 처음 창조의 순서를 보면, 부부가 먼저 있었고, 부부가 가정을 이뤄서 부모가 되고, 자녀가 나왔습니다. 행복의 질서를 바로 알고, 행복한 부부, 존귀한 부모, 사랑스러운 자녀들로 가꾸는 행복한 가정을 세우시길 바랍니다. 5월 21일 금요일은 부부의 날입니다. 꼭 관심 가지고 기억하셔서 사랑을 표현하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행복한 부부, 복된 가정이 되길 축복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엡5: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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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5-19
  • 목회단상> 어머니의 편지
    임태주 작가의 <그토록 붉은 사랑>이라는 산문집에 나오는 <어머니의 편지>라는 글입니다. 시인의 어머니가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발견한 편지랍니다. 아들아, 보아라. 나는 원체 배우지 못했다. 호미 잡는 것보다 글 쓰는 것이 천만 배 고되다. 그리 알고, 서툴게 썼더라도 너는 새겨서 읽으면 된다. 내 유품을 뒤적여 네가 이 편지를 수습할 때면 나는 이미 다른 세상에 가 있을 것이다. 서러워할 일도 가슴 칠 일도 아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뿐이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 것도 있다. 살려서 간직하는 건 산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무엇을 슬퍼한단 말이냐. 나는 옛날 사람이라서 주어진 대로 살았다. 마음대로라는 게 애당초 없는 줄 알고 살았다. 너희를 낳을 때는 힘들었지만, 낳고 보니 정답고 의지가 돼서 좋았고, 들에 나가 돌밭을 고를 때는 고단했지만, 밭이랑에서 당근이며 무며 감자알이 통통하게 몰려나올 때 내가 조물주인 것처럼 좋았다. 깨꽃은 얼마나 예쁘더냐. 양파 꽃은 얼마나 환하더냐. 나는 도라지 씨를 일부러 넘치게 뿌렸다. 그 자태 고운 도라지꽃들이 무리지어 넘실거릴 때 내게는 그곳이 천국이었다. 나는 뿌리고 기르고 거두었으니 이것으로 족하다. 나는 뜻이 없다. 그런 걸 내세울 지혜가 있을 리 없다. 나는 밥 지어 먹이는 것으로 내 소임을 다했다. 봄이 오면 여린 쑥을 뜯어다 된장국을 끓였고, 여름에는 강에 나가 재첩 한 소쿠리 얻어다 맑은 국을 끓였다. 가을에는 미꾸라지를 무쇠솥에 삶아 추어탕을 끓였고, 겨울에는 가을무를 썰어 칼칼한 동태 탕을 끓여냈다. 이것이 내 삶의 전부다. (중간 생략) 내용 중에는 이장 집 잔치에 일하러 갔을 때 다른 엄마는 주인 몰래 자신의 새끼들을 불러 음식을 챙겨 먹였는데 시인의 어머니는 그것은 도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자식에게 먹이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왜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처럼 먹을 것을 주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자신의 도리는 다했지만, 자식의 마음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음식을 챙겨주지 못한 것을 용서하라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제 마지막 단락을 소개합니다. 혼곤하고 희미하구나. 자주 눈비가 다녀갔지만 맑게 갠 날, 사이사이 살구꽃이 피고 수수가 여물고 단풍 물이 들어서 좋았다.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러니 내 삶을 가여워하지도 애달파하지도 마라. 부질없이 길게 말했다. 살아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너를 사랑으로 낳아서 사랑으로 키웠다. 내 자식으로 와주어서 고맙고 염치없었다. 너는 정성껏 살아라.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 같고, 이 땅에 오신 우리 주님의 이야기 같아서 이 글이 좋습니다. 저의 젊은 추억 속에도 삐뚤삐뚤 철자 틀린 어머니의 낡은 손편지가 생생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이나 주님의 사랑이나 어찌 그리 붉은지요. 어머니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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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단상
    202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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