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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장 요가와 건강 2. 병이란?
    <송정민 원장의 요가교실>   제4장 요가와 건강 2. 병(病)이란? 생로병사,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늙고 병들고 하는 것은 누구나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이다. 일찍이 요가 선각자들은 ‘병(病)이란 한마디로 생명(生命)의 충고이다.’라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병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생명의 신호이다. 이는 올바르지 못하고 참되지 못한 것을 바르고 참되게 하고자 하는 생명 생존에 대한 자연현상이요, 자기모순에 대한 순수한 가르침이요, 참 진리이다. 따라서 건강이라는 것은 육체적으로 자연스러운 형상의 필수조건인 것이다. 인간의 생명력은 살려고 하는 의식적인 의지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생명본능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암이 무서운 것은 암에 걸렸을 때 생명이 아무런 신호나 충고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이 쓰리거나 쿡쿡 찌른다거나 통증을 전혀 주지 않고 암이 3~4기로 진행된 후 그때 아픔의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만일 초기에 생명이 충고를 주었더라면 쉽게 반성하고 잘못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병(病)이란 우리의 생명을 빼앗아 가려는 무서운 적이 아니라 생명 생존을 위한 충고임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병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에서 벗어나 이해하고 다가가 미안하다 용서받고 잘못을 뉘우치며 참회할 때만이 병으로부터 해방되며 생명 생존에 대한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버릇없고 말썽꾸러기 애들도 늘 부모나 선생님이 바르게 지도하고 충고를 함으로써 바른길로 건강하게 잘 자라게 된다. 우리의 생명에 대한 잘못된 생활습관 습벽으로 건강을 해칠 때 병(病)이 올바른 충고자로서 자신이 받아들일 때만이 우리들의 건강을 지켜줄 수 있는 참다운 생명의 주인의 모습일 것이다.   모든 병(病)의 발병 원인 ① 같은 환경(나쁜 자연환경, 주거환경, 직업 환경,)에서 발병한다. ② 같은 몸의 작동(혹사, 과로)에서 발병한다. ③ 같은 몸의 자세(치우침, 무리)에서 발병한다. ④ 부적절한 호흡(폐첨호흡과 같이 어깨로 숨을 쉰다든지, 무기력하고 거칠고 빠른 호흡)에서 발병한다. ⑤ 나쁜 음식과 식사 방법(편식, 과식, 폭식, 절식)에서 발병한다. ⑥ 잘못된 생각(사고-思考), 편애, 편견, 사상, 철학, 과욕에서 발병한다.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병의 원인으로부터 끊임없이 변화의 생명(生命)을 추구하 고자 하는 것이 요가의 철학이다.   3. 자연의 섭리와 건강 사람의 몸은 자연의 근본적인 규칙을 따르고만 있으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 건강이란 자연스러운 조건 하의 생활이다. 그와 반대로 병이란 부자연한 생활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현대문명은 우리를 부자연한 생활 쪽으로 쫓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직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건강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먹고, 마시고, 자고, 입고, 숨쉬고, 일하는 것 어떤 것을 막론하고 오늘날 우리가 놓여진 현대라는 현실 속에서 행위 하는 모든 생활 형태는 부자연하기 비길 데 없는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더구나 문명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일수록 그 폐단이 더 심하다.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있다. 즉 지적(知的)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은 체질이 섬세하고 약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도 의식적으로 적어도 하루에 몇 분간만이라도 신체에 생명력을 공급하는 힘에 대하여 의식을 집중하기만 하면 밸런스가 회복되는 것이다. 즉 신체가 건강해지고 저항력(抵抗力)이 증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가의 요점이 된다. 종교에서는 “윤리적인 생활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자연과학과 깊은 관계가 있는 말이다. 정신이 육체에 직접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와 반대로 육체가 정신에 주는 영향도 또한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육체가 부도덕한 행위를 하면, 반드시 정신도 더러워질 것이다. 종교에서는 계율이 바로 그것이다. 육체를 이끌기 위해서 정신에 주도권을 주는 것이 종교의 방법이다. 그러나 정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육체의 보강을 앞세우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한쪽에 치우쳐 있는 것이다. 요가는 이런 경우 정신 쪽으로도 육체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어디까지나 두 개의 균형적인 조화로서 인간의 건전한 발전을 기도한 것이다. 즉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서 가장 자연스러운 생명이게 하려는 것이 요가의 목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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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1
  • 제4장 요가와 건강
    < 송정민 원장의 요가교실>        제4장 요가와 건강   1. 인간 생명의 본능   “나는 길이요, 진리(眞理:참된 이치나 도리)이니라”라고 성서에 쓰여 있다. 그와 꼭 같은 사실을 요가에서도 가르치고 있다. 즉 “생명은 자아(自我)다”라고. “자아”라는 것은 원래는 아주 깨끗하고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물질적 형체-육체-를 택했을 때 물질적인 조건의 구속, 바꾸어 말하면 이 세상의 틀 속에 갇히는 부자유라는 죄를 갖게 된다. 물질과 시간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을 흐리게 하며, 육체가 다시 자유로운 정신이 되려면 몇 천년 이라는 발전과 성장의 고난을 치러야만 하게 된다. 오늘날에도 아직 그 발전과 성장은 끝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요원한 것이다. 육체에 발전단계가 있듯이 정신에도 발전의 단계가 있다. 모든 사람의 연령은 그 사람 진보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일반적인 발달 수준보다 낮은 사람도 있고 높은 사람도 있다. 그 정신의 발달 정도는 천차만별이지만 정신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 즉 자아를 되찾은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될 것이며, 그리고 그 사람조차도 자기라는 개체 즉, 신체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도달한 의식의 발전 정도가 다양하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의 수만큼 되는 것이다. 완전한 균형과 완전한 조화 속에 놓인 “자아” 즉 생명의 완벽한 힘을 지닌 사람은 그 자신의 신체 속에 완벽한 건강을 지니게 된다. 이렇게 평형을 이룬 생명의 의식 상태는 심장을 중심으로 하여 전신 곳곳으로 고르게 생명의 에너지를 반사적으로 분배한다. 무슨 이유로 해서든지 의식이 어느 한 방면으로만 쏠리거나 또는 안가든가 하면 평형 상태를 잃게 되니까 생명력의 유통이 난맥상을 이루고 만다. 그러나 가장 완벽한 자아는 그 완벽한 밸런스로서 이 흐트러진 상태를 원상태로 회복시키려 하며 비상한 노력으로 그것을 성취시킨다. 이와 같은 불균형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것, 즉 질서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는 비상상태를 사람들은 병(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강이라는 것은 육체적으로 자연스러운 필수 조건인 것이다. 인간의 생명력은 살려고 하는 의식적인 의지에만 의존 하는 것이 아니다. 무의식의 생명본능에 의해서 살아 있는 것이다. 그 생명 본능은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된다. 자기 보존 본능과 종족보존본능이 그것이다. 이것들은 무섭도록 강한 힘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있는 원시적인 힘이다. 자기 보존 본능이 목적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생명과 건강의 연장이다. 그 본능은 무섭도록 강한 것이어서 위기에 직면하면 평소에 참한 사람도 야수처럼 사나워지는 것이다. 침몰해 가는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은 구명보트를 서로 타려고 남을 죽이려고까지 할 정도이다. 이런 때 무아의 경지에 이르도록 고도의 정신적 성장을 한 사람만이 이기적으로 되지 않고 자기 보존의 본능을 극복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이 강한 정신의 힘은 자기의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우리가 범하기 쉬운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하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유해한 노폐물과 독소를 제거하여 자기 자신을 정화시키는 힘인 것이다. 생명력은 자기 보존 본능을 위하여 자기를 건강 상태로 유지하려고 늘 노력하고 있다. 마치 배의 방향이 아무리 이리저리 바뀌어도 언제나 북극성을 가리키는 나침반처럼 생명력은 우리의 의사가 어떻든 간에 신체 속에서 건강한 방향만을 가리키고 있다. 생명력에 거역하고 배반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그것은 씨앗에서 싹이 돋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 싹은 딱딱한 껍질을 뚫고 나와 햇볕을 찾아 가지가 되고 잎이 되고 꽃이 되며 뿌리는 땅속으로 깊게 뻗어 내린다. 그와 같이 우리들의 생명력은 인체의 한 부분에 상처가 생기면 신속한 솜씨로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동원하여 고쳐 놓고 만다. ‘의사는 치료하고 자연은 건전하게 한다.’ 는 말은 참으로 진리이다. 의사는 메스를 써서 수술을 하고 빠진 뼈를 맞추어 놓을 따름이고 그것의 완전한 회복은 생명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생명력이 충분한 능력을 발휘해 주고 있으면 우리는 건강한 것이다. 설령 우리가 무지해서 생명을 학대하고 해치려 해도 생명력은 언제나 건전한 생명이 되도록 노력을 하고 있다. 죽음의 순간까지 생명력은 그 사명을 다하고자 싸우고 있는 것이다. 씨앗은 바위틈에 떨어져도 그 틈바구니에서도 싹을 틔워 자라 하늘로 뻗어가는 것이다. 어떤 환경이라도 생명력은 그것을 극복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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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0
  • 제3장 행복한 삶과 요가
         1. 진실은 자신으로부터 해방된다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의 신조는 우리가 일상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 보고. 감촉하는 일들은 일체가 세계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오직 하나의 참다운 사실은 각자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느끼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뇌에 전달되어 오는 것밖에는 감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모든 사물도 이상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또 그 기능이 중지하면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요가에서는 오관(五官: 다섯가지 감각기관. 눈ㆍ코ㆍ귀ㆍ혀ㆍ피부)의 속박에서 그 사람을 해방시키고 자기 내부에 있는 진리의 세계에 살게 하려고 한다. 요가를 실천ㆍ수양하면 순수한 황홀경에 도달하여 온 세계와 완전히 조화된 기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체의 잡념에서 자기를 벗어나게 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만저만한 수련을 쌓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방법으로서 요가에서는 독특한 호흡법과 신체적 훈련이 연구된 것이다. 특히 신체의 조정 훈련은 전신의 각 부분을 정상적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며 정신통일에 지장이 되는 일체의 장애를 제거한다.   2. 요가는 행복한 자아의 발견이다   요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요가 수련은 한 사람의 마음속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뿌리박게 한다는 사실이다.사람이 마음속으로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신념을 갖게 되면 몇 배의 능률로서 그 일을 해치울 수 있는 법이다. 매사를 척척 처리하지 못하고 늘 소극적으로만 머뭇거리는 사람이 요가를 실천하면 일변(一變: 아주 달라짐)하여 자신만만해지고 무슨 일에도 적극성을 띄게 된다. 그리고 요가 수련을 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마음의 침착성을 얻을 수 있다. 어느 변호사는 “나는 흥분하기 쉬운 성격이며, 흥분하면 전신이 경직하고 모든 신경 계통이 역류하는 것 같고, 그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요가를 몇 달 동안 했더니 흥분이 완전히 해소되고 이젠 아무리 어렵고 복잡한 사건이라도 무난히 처리할 수 있게 됐다”고 고백했다.   3. 요가는 언제나 젊음과 건강을 준다   언제까지나 젊고 늙지 않게 하는 것도 요가수련에서 얻는 이득의 하나이다. 요가에서 가르치는 자세를 바르게 하는 여러 가지 체조는 대부분이 척추와 허리, 배 같은 부분의 체조이다. 이것에 대하여 미국의 요가 연구소 창시자인 구뿌타 씨는 “모든 인간은 척추만 유연하고 정상적이면 노쇠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히말라야에 있는 어느 요기는 백살을 넘기고 여러 해가 되었는데, 그 음성은 힘차고 명료하며, 체력은 젊은이를 능가하며, 하루 평균 열다섯 시간이나 나무 베는 일을 한다고 한다. 요가수련으로 불면증이 치료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이 해석해도 무방하다. 흥분하기 쉬운 사람은 낮의 긴장이 밤까지 계속하여 자리에 들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요가는 마음의 침착과 평온을 가르치니까 자신을 갖고 일을 하고 처리를 하게 되며, 밤이 되면 모든 긴장이 자연히 해소되고 조용한 점을 얻을 수가 있다. 뉴욕시의 요가 연구소장 마쟘 박사는 불면증으로 고민하는 40대의 실업가가 정신분석학자의 치료를 받았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는데 요가를 시행했더니 얼마 안 되어 불면증이 나았으며, 몇 해 동안 계속 먹던 수면제를 버리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정신 집중이나 통일에 요가수련이 다시없이 좋은 수련이라는 것은 뉴욕의 인도문화센터 창립자인 바스챤 여사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누구나 사람은 자기의 일에 열중하지 못하면 그로 인한 유형의 손실은 실로 막 대하다. 요가는 이렇게 산만한 정신을 통일시켜 자기 일에 열중하게 되니까 일의 능률도 오르고, 또 완전한 결과를 갖게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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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07
  • 제2장 요가와 건강생활
         송정민 원장 (요가와 만남 저자)    4. 요가는 인간의 성격을 변화시킨다   신비스러운 요술인지 건강과 행복을 초래하는 열쇠인지 몰라도 지금 요가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다. 보기에는 딱할 정도로 내성적인 사람이 회사 내에서 미팅이나 간부 회의에서 발언이나 브리핑을 할 수 없어 땀을 뻘뻘 흘리며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던 사람이 요가 수련 1년 후에는 당당히 소신껏 발언을 할 수 있는 성격으로 완전히 달라지는 모습으로 변하였으며, 날마다 만들어야 하는 식사 반찬조차 남편의 도움 없이는 만들지 못하던 소심한 성격의 어떤 부인은 1년 반의 요가 수업으로 매사에 자신이 생겨 이제는 집안의 온갖 일을 혼자서 해결하는 주부가 되었다고 한다. 어느 실업가는 요가 수업으로 여러 해 동안 고민하던 불면증을 극복했으며 어떤 변호사는 우울증을, 또 어느 학생은 불안과 초조했던 시험 공포증을 극복하였다고 한다. 이런 예들은 많은 요가 수련생들이 요즈음 인기 절정인 요가에 대해 여론 조사한 많은 실제 사례 중의 일부분이다. 다양한 자세의 동작과 두 다리를 접고 앉아 명상하는 모습을 보고 요가는 동양에서 전해온 일종의 요술이 아닌가 하고 의아해하면서도 좌우 간 많은 사람이 한국과 미국에서 일대 센세이션(Sensation)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오늘날 많은 사람으로부터 관심의 대상인 것만은 사실이다.   5. 요가는 현대과학이 풀 수 없는 신비(神秘)이다   인도에서는 오랜 세월 수업한 요기(妖氣:요가 수행자)가 상식을 벗어난 일을 해치워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자주 있다. 시뻘건 숯불을 맨발로 딛고 서 있다든가 유리를 씹어 삼킨다든가 또는 여러 날 동안 흙속에 생매장을 당하고 있다든가 하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볼 수 있다.   1951년 영국 잡지(판세트)에는 인도의 슈림 람쟈지라는 중이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을 실행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 요기는 뭄바이의 큰길에서 1만 명의 관중이 주시하는 가운데 네모난 시멘트 상자 속에 밀봉되었다.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그로부터 56시간 뒤에 그 뚜껑에 적은 구멍을 뚫고 물을 가득히 채워 넣었다. 그리곤 일요일 아침 밀봉했던 뚜껑을 떼었더니 그 요기는 물속에서 불끈 일어나 몸을 서너 차례 흔들고 나서 눈을 뜨고 사방을 살펴보더라는 것이다. 이처럼 신비한 기술은 요가를 체득한 사람들이 인간의 생리적인 현상을 심리적으로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는 것을 실증하는 것이라고 한다. 의사나 과학자들이 요기들을 여러모로 조사하고 실험해 본 결론은 아직 안 나와 있지만, 요가의 체득자(體得者)들이 행한 행적에 관한 이론적 설명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요기들은 자기의 육체를 억제 상태로 놓아둘 수 있다. 이 상태에서는 신체의 중요한 기능에 대변화가 생겨 신진대사 작용이 둔화되고 심장의 고동이 약해지고 호흡도 훨씬 느려진다는 것이다. 최근에 미쉬캉대학의 의학교수들이 실험해 본 결과 명상하고 있는 요기들의 호흡은 매우 느려져서 보통 사람이 1분간에 16회에서 23회인데 비해 그들은 3회에서 5회밖에 안 되었다. 이 사실은 뭄바이의 요기 중이 밀봉된 상자 속에서 며칠간을 살아 있던 사실을 수긍케 한다. 의학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요기들의 깊은 명상 상태는 분명한 자기최면으로서 이 상태에 들어가면 어떤 고통에도 무감각해지며 이를 뽑아도 아픈 줄을 모른다고 한다. 이 사실은 롱 아일랜드의 임상 실험학자 멜빈캇트 박사의 말로도 증명된다. 박사는 요가 실천자들은 자기 암시(暗示)에 의하여 완전한 최면상태에 들어가면 일부의 생리기관의 활동을 정지시킬 수가 있으며 그 부분의 감각을 완전히 없앨 수 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더 알기 쉽게 말하면, 뇌(腦)라는 교환대에 있는 스위치를 뽑아 버리면 그에 해당하는 신경의 감각이 없어져서 관련된 신체(身體)부분의 감각을 중앙에까지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작렬하는 숯불 위를 걸을 수 가 있고 손바닥에 못을 박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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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6
  • 요가의 교전과 실천철학
    요가의 교전(敎典:교육의 기본이 되는 법칙)        요가의 교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가밧트(Bhagavad:요가의 고대 경전), 고대 인도의 종교시(宗敎詩), 둘째는 요가 슈트라(Sutra:인도 파탄쟈리가 지은 요가 파의 근본 경전), 셋째는 쿤다리니 슈트라(Sutra:인간 속에 우주의 힘인 생식 능력과 초능력이 항문 주변에 잠들어 있으며 그 잠재 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생명과 영혼의 근원이며 요가 수행자만이 우주 에너지 쿤다리니를 각성시킬 수 있다) 교전이 있다.  요가란 말 그 자체의 뜻은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결합, 조화, 통일, 안정을 뜻하지만, 이 세 가지 교전에서는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바가밧트』에서는 요가를 직시법(直視法:올바르게 보는 방법), 신비한 힘을 얻는 법, 지혜를 얻는 법, 신과 인간이 융합하는 법, 자기를 버리는 법, 무집착으로 이르는 길, 해탈에 이르는 길 등등 여러 가지로 풀고 있지만, ‘해탈을 목표로 하여 심신을 합리적으로 수련하는 법’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다.  『요가 슈트라』에서는 ‘자기를 개발 육성하여 컨트롤하는 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뜻을 종합하여 현대적인 용어로 요약하면, ‘해탈(解脫:번뇌나 괴로움에서 벗어남)’, ‘컨트롤’, ‘밸런스'의 세 마디로 집결된다. 해탈이라고 하면 악과 괴로움에서 탈출하여 자유롭고 옳은 상태로 이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온갖 종교, 문화, 학문, 예술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이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 요가의 실천철학(實踐哲學) 정신적, 육체적 훈련만이 인간의 능력과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요가의 진의(眞意:속에 품고 있는 참뜻)이다. 인간은 교육과 훈련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교육이나 훈련이라는 것은 연습으로서 원하는 대로 자기가 되도록 하는 것이며, 이것이 제2의 천성인 것이다. 그것이 무의식적인 것일 때 습관이나 습벽이고, 의식적일 때 그것은 자기 능력이요, 가능성인 것이다.  나쁜 버릇이 몸에 배면 원래는 건강을 유지하게 되어있는 체력을 건강하지 않게 만들어 버리고, 오해나 미신이나 소극성이 마음에 배면 정신도 무기력해지고 불안과 범죄적 성격자로 되어버린다. 더구나 습관성은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며, 깨닫는다 해도 의식이 지배하는 힘은 약 5%에 지나지 않으니까(심리학자, 생리학자들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들의 생활은 95%가 무의식이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의지의 힘만으로는 개선하기 힘들다. 이처럼 자기를 조종하고 있는 나쁜 버릇은 오랜 세월 속에서 몸에 밴 무의식의 힘에 의한 것이니까, 자기를 개조하려면 올바른 습관이 붙도록 그것을 되풀이해서 훈련할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이고 즉석식품처럼 효과를 얻으려는 것이 현대인의 생리이다. 그 증거로 자기의 노력을 바치지 않고 얻기를 바라는 현대인을 위하여 모든 문명의 이기가 연구되고 발전하고 있다. 우선 병만 하더라도 그런 병에 걸린 악조건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약으로 병균을 없애서 건강을 되찾으려고만 하는 것이 현대인의 심리이다.  요가에서는 자기 이외의 것에 책임을 전가하고, 자기를 구출하는 것이 타인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장 나쁜 미신으로 간주하고 있다. 자기 아닌 것으로서 보호받고 살려는 인간은 무의식간에 의뢰심이 생기며 그 틈새로 새어드는 것이 미신이다. 종교의 이름으로 신(神)과 불(佛)을 의지하고 학문의 이름으로 과학적 용어를 빈번하게 쓰다 보면 그런 것들에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자기상실이라는 가장 위험한 병에 걸리는 것이다.  요가가 실천의 철학이라 하는 이유는 결코 그 어떤 종교나 그 어떤 학문이나 과학과도 다르게, 오직 자기 노력으로 자기 능력을 증가시켜 스스로를 높은 조화와 완벽한 안정의 자리로 이끌어 올리는 실천 철학의 연유인 것이다. 또한 체험을 통하여 자기를 아는 요가는 그 체득한 경지가 바로 자기해탈(自己解脫:자신의 번뇌나 괴로움에서 벗어남)이라는 동양 철학의 궁극에 다다르는 것이다.
    • 기획
    • 요가교실
    2020-03-09
  • 요가의 목적과 효과
        제4단계 사마디(Samadhi)=삼매(三昧) 초월의식 삼매(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대상만이 빛을 발하는 상태)는 자신이 원할 때 나타나는 것도 아니며 정려를 부지런히 수련하다 보면 저절로 다가와서 펼쳐지는 것이다. 따라서 삼매의 깨달음은 지혜이며 크게 깨달은 해탈의 세계인 것이다. 삼매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을 직관이라 하며 직관에 의한 깨달음을 지혜라고 한다.  사고에 의한 지식과 직관에 의한 지혜는 서로 관계가 있으나 다르다. 과학적 지식은 사고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분석적, 추상적, 논리적이지만 직관에 의한 지혜는 총합적이고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것이다. 또한, 직관적 지혜는 철학의 근원이 되면 생활의 지혜는 생활 요가적 삼매를 통해 얻어진다. 진리라 하더라도 진리 그것 자체로서는 삶의 힘이 되지 못한다. 자신의 땀과 노력으로 얻어진 진리가 자신의 깊은 신념과 행동으로 발휘될 때 삶의 힘이 된다. 따라서 참된 가치가 있는 진리는 삼매의 수행을 통해서 온다.  직관적 체험이 깊어지면 마음의 흐름도 희박해지고 대상의 모습도 사라진다. 이와 같은 생각의 대상과 감정적 의식도 사라져 버린 경지를 무종삼매(霧鐘三昧:마음의 작용이 아직 남아 있지 않은 상태)라 하며 해탈(Mukti:번뇌나 괴로움에서 벗어남)또는 공(空=Sunya)의 경지를 뜻한다. 이 경지는 허무의 경지가 아니다. 숙면이나 기절과 같은 것도 아니다. 명석함이 있고 보통과는 다른 의식이 있다. 이때의 의식을 초월의식(超越意識=Brahman:육체의 속박을 벗어나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불가사의한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는 의식)이라 하며 이 상태에서는 자아와 보통의 자기를 혼동하지 않으며 자기라는 이기의 속박을 벗고 참된 자기의 백광(白光)을 보게 된다. 이러한 삼매의 체험은 비록 짧은 순간일지라도 나의 삶에 큰 지혜의 원천이 되고 그 체험의 향기는 인격을 완성해주며 저절로 생활을 변화시켜 보다 높은 곳으로 승화시켜준다. 삼매의 체험은 완전한 건강을 얻게 해 주고 넓은 세계를 열어준다. 심오한 경지가 아니더라도 일상생활에서 명상을 즐기면 심신의 건강이 증진되고, 신경질서가 잡히고 혈액이 맑아진다. 이처럼 네 가지 조건을 수련함으로 자연의 생활인으로 건강하고 오래 생명력 유지와 행복한 삶을 성취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누구나 행복의 추구일 것이다.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나 기를 쓰고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 그리고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생활하고자 하는 것들은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잘 살아 가고자 하는 것이다. 요가 또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할 때만이 가능하며 건강은 곧 자연의 생활을 실천할 때만이 얻어질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조건은 요가호흡 훈련과 자연의 食, 건강한 음식으로 균형 잡힌 몸을 만드는 아사나(ASANA:체위법)와 명상을 통해 건강한 사고력으로 수행을 함으로 얻어질 수 있다는 실천적 철학이다. - 요가의 효과   인도를 여행한 사람으로서 어려운 곤란을 무릅쓰고 본격적인 요가를 구경할 수 있는 행운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80세나 90세가 된 요기들에게서 30세 전후 같은 인상을 받고 놀랐을 것이다. 그들은 일반적인 상식이나 기준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게 오래 살고 건장한 것은 그들의 육체에 새로운 생명력을 자기의지의 힘으로 주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히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요가의 목표는 아니다.  ‘하타요가(HATHA YOGA:신체 단련 요가)’ 자체가 종국의 목표가 아니고 더 높은 정신적인 성장을 위한 준비이다. 병약한 소년에게 처음부터 의식을 발달시켜 지성의 고도한 활동을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선 먼저 육체 내부에 있는 힘의 존재를 알게 하고, 그 뒤에 그것을 올바르게 통제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보통 사람 눈으로 기적같이 보이는 불가사의한 힘을 얻게 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런 사람들은 목표를 향하는 도중 섬에 표류한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더 이상 진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기들이 노력해서 도달할 궁극적인 목표는 물질적인 현상세계라는 감옥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에 대한 지식, 또는 그 비밀을 깨우쳤다고 해도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소중하고 신기한 것이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궁극의 목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요기들은 쓸데없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그들의 기술과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참다운 요기가 아니다. 참다운 요기는 그런 능력을 남을 돕기 위해서만 써야 한다.      
    • 기획
    • 요가교실
    2020-02-26
  • 요가의 목적 - 자연의 心
        송정민 원장 (요가와 만남 저자)   제3단계 디아나(Dhyana) 정려(靜慮) 명상   디아나라는 단어는 지성(知性)을 의미하는 어근 ‘dhi'에서 생겨났다. 그래서 명상이라고 하는 어휘에는 지력 또는 마음이 어느 한 곳으로 흐르게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디아나는 하나의 대상에 관하여 동일한 사념(思念, 근심,걱정)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한 사념이 약해지기 전에 동일한 새로운 사념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식으로 매우 빠르게 이어진다. 디아나가(冥想:고요히 눈을 감고 생각함) 다라나(集中)와 다른 점은 바로 이 연속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경전에서는 명상과 집중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즉 기름을 부을 때와 물을 부을 때 보이는 양상의 차이인데 둘 다 한 곳으로 부어 지기는 하지만 물의 흐름은 단속적임에 반해 기름의 그것은 지속적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어떤 느낌의 흐름은 내적으로 관조하면 생각의 흐름이 시작되고 유지되고 소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상념이 태어나고 변화하여 사라진 후에 다시 새로운 상념이 떠오를 때 까지의 상념과 상념 사이는 공허한 틈이 있으며 이 틈을 점차 확대하여 가면 쉴 사이 없이 일어나려는 상념을 누를 수가 있다. 이 틈, 즉 공백 상태를 정려(精慮)라고 한다. 운동과 운동 사이, 호흡과 호흡 사이, 욕구와 욕구 사이, 말과 말 사이의 침묵, 생(生)과 사(死)의 사이 또는 공백이 정려가 흐르는 시간이다. 응념(凝念)과 정려(精慮)는 서로 상대적인 면이 있다. 응념(凝念)과 상념(想念)을 단순화하려 하지만 정려는 그 상념을 진전시킨다. 응념이 수직적이라면 정려는 수평적이다. 응념이 구심적이라면 정려는 원심적이다. 응념은 단순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지만 정려는 응념으로 터득한 명확한 대상을 시간적으로 길게 그리고 폭넓게 적용하여 상념의 흐름을 확대하는 것이다. 즉 넓은 시야의 마음이다. 그러나 마음의 시야가 넓어지는 것 때문에 상념의 힘이 흐려져서 하나의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약화하여 이미지가 흐려진다면 정려가 아니다. 꽃을 대상으로 한다면 그 꽃의 전체적 상징성이 명료해지는 것이 응념이며 그 꽃의 선명한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색체, 모양, 향기, 그 생산자, 가지고 온 사람, 신선도 등을 끝없이 상념을 계속하여 확대하여 이어져 가는 것이 정려이다. 1응념은 12호흡을 뜻하고 12응념이 1정려라 한다. 바로 그 정려의 종점을 선정(禪定:산란한 마음이 멈추는 것)이라고 하며 삼매(三昧: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대상만이 빛을 발하는 상태)의 경지에 접어든 첫 표시이다.   제4단계 사마디(Samadhi) = 삼매(三昧) 초월의식 사마디라는 글자는 sa(함께)+ma(완전히)+dhi(붙들다)로 구성되어 있으며, 결국 “완전히 함께” 있음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사마디가 디아나와 다른 점은 여기서는 어떤 세상에 대해 동일한 사념 파동이 지속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아(自我:자기 자신, 사고, 의식)가 그 대상 속으로 흡수되어 버리거나 그것과 완전히 동일화 된다는 것이다. 집중이 고조되면 명상이 되듯이 명상이 극에 달하면 초월의식에 다다른다. 명상 중에는 오직 마음과 대상만이 의식되는데 여기서 명상이 강렬해지면 마음과 대상이 서로 혼용(混用)하여 마음은 더는 그 자체를 의식하지 못한다. 이처럼 주체와 객체가 함께 녹아들어 상호간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사마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사마디 첫 단계이다. 사마디라고 하는 단어는 사실 몇 단계의 더 높은 의식 상태들을 총괄하는 용어이며, 의식이 진보할수록 그것은 점점 더 심원해져서 결국은 완전한 자기인식의 상태에 이른다. 사마디의 단계들은 의식이 그것의 근원인 진아(眞我:참모습의 자기)로 되돌아가는 정신적인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마디(三昧)는 해탈의 경지이며 지혜가 얻어지는 진아(眞我)의 경지이다. 파타자리의 요가 경(經_YOGA-SUTRA)에 의하면 “삼매란 한 곳에 집중된 선정(禪定 :산란한 마음이 멈추는 것)이 그 대상만이 빛나고 자기 자신은 없어진 것이 된 상태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깨달음의 경지라고 본다. 가장 깊고 바르게 깨우치려면 무슨 생각을 하든지 또는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주체적 요소가 모두 사라지고 그 대상 자체만 살아서 빛나게 된다. 사적인 이익이나 집착이 개입되면 사물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자기식으로 보기 때문에 객관적 사고에서 벗어나 편견이 되어 오해가 발생한다. 오해나 편견은 지혜일 수 없다. 정려의 깊은 단계에서는 관념(觀念:견해나 생각)의 흐름이 모두 소모되어 버리고, 스스로 종말에 이르며 이 상태에서는 더욱 근본적으로 높은 능력이 발휘될 수 있으며, 이러한 경지가 삼매의 상태인 것이다. 주관과 객관이 합일(合一)되고 상념의 대상은 그것 자체로 존재하며 그 본질을 깨닫게 해준다.
    • 기획
    • 요가교실
    2020-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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