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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9.29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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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국제도시의 인구가 곧 10만명을 돌파합니다. 인구의 유입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지역으로 손꼽히는 영종국제도시는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인천공항뉴스에서는 영종·용유·무의가 고향인 원주민부터 새롭게 이주한 주민들까지 우리 지역에 사는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과거부터 현재까지 귀감이 되는 인물을 발굴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영종국제도시의 인물열전에 독자들께서도 많은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첫 번째 인물은 운북동 예단포에서 태어나 법무부장관과 대법원장을 역임하신 조진만 전 대법원장 입니다. 조진만 전 대법원장에 대한 아래 글은 201811월 사법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 법원 인물사를 참고 하였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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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도 예단포 마을에서 태어나 법무부장관과 대법원장을 지낸 조진만 전 대법원장.

 

영종이 낳은 인물 조진만 대법원장

 

예단포에서 태어난 수재

 

조진만(趙鎭滿, 19031979) 대법원장은 19031020일 인천광역시 중구 운북동 1037(예단포마을)에서 태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1900년대 초 예단포는 가구수가 200호가 넘고 어선도 100척이 넘는 곳으로 인근 지역에서는 가장 크게 번성했던 포구였다고 전한다.  

 

조진만은 1907년부터 인천 최초로 개교한 인천공립보통학교를 다녔고 졸업 후에는 당시 명문이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3·1운동에 참여했던 조진만은 잘못을 인정하면 용서해준다는 일본인 교사의 회유를 뿌리치고 끝내 퇴학당한다. 이후 독학으로 1920년 경성법학전문학교(서울법대 전신)에 입학하고 1923년에 졸업했다. 1925년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1927년 해주지방법원판사를 시작으로 평양·대구지방법원판사를 역임했다. 1939년에는 대구복심법원 판사 및 대구지방법원 판사를 겸하게 되었으며 조선인 최초로 부장판사로 승진했고, 1943년 퇴직하며 일제 법관 생활을 마무리 하게 된다

 

19433월 조진만은 부장판사에서 퇴직하고, 그해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조진만의 변호사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는 광복 이후로, 찬탁과 반탁이 대립하고 정국이 혼란스럽던 당시 재야 법조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조진만은 19461월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개회되었을 때도, 한반도 통치를 둘러싼 문제와 다른 나라들의 개입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194511월 일제의 제국주의교육을 철폐하고 조선 교육의 새로운 건설을 위하여 조선교육심의회가 조직되었을 때 이에 참여하였고, ·우익계 학생들이 충돌한 학병동맹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위원회의 조사위원에 선임되었다. 학병동맹 사건공판이 개정된 뒤, 그는 직접 학병동맹 피고인들을 변론했다.

 

조진만은 6·25 당시 정부가 부산에 피난해 있던 19515월 제5대 법무부장관에 임명된다. 조진만은 법무부장관 취임연설에서 인권옹호에 노력할 것을 제일성으로 내세우면서, 우리나라 헌법은 국민에게 주권이 있음을 천명하고 있으므로 공무원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부탁을 받는 공복으로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취임 초기 검사장 인사이동문제에서부터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을 빚었던 조진만 법무부장관은 결국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법무부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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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반의 예단포 마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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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예단포 모습. 미단시티 개발로 예단포 마을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대법원장으로 사법개혁에 앞장서

 

조진만이 대법원장으로 임명된 시기는 19615.16 군사정변으로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시기였다. 당시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제18조에서는 대법원장과 대법원판사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제청으로써 대통령이 이를 임명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이에 따라 1961630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이 법관과 서울 제일변호사회의 추천을 받아 조진만을 대법원장에 임명하게 되고, 1963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이듬해 조 전 대법원장을 제4대 대법원장에 임명했다.

대한민국 사법부 대법원장에 취임한 조진만은 취임사에서 첫째, 국민이 믿어주는 사법부를, 둘째, 옳은 일을 감행하는 용기를 지닌 사법부를, 셋째, 끊임없이 근면하는 사법부를, 넷째, 인화가 있고 단결된 사법부를, 다섯째, 명랑한 사법부를 이룩하자고 강조했다.

 

조진만은 대법원장에 취임하자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민사 소송의 틀을 잡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서 배우고 익힌 사법제도를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고쳐 활용하면서 민사소송 체계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특히 대법원장 시절 판결문을 한글로 쓰도록 하는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당시로선 엄청난 일이었다. 이유는 우리나라 말이 있는데 왜 다른 나라말로 판결문을 쓰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재야법조인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화를 추진, 법원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판결문뿐만 아니라 법원의 모든 문서를 한글로 전용하도록 했다. 판결서의 한글화는 일반 국민들의 판결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우리말로 된 법률용어 사용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타자기 사용과 가로쓰기로 전환해 판결서 양식을 통일시키게 된다.

 

조 전 대법원장은 조직 개편에도 관심을 쏟았다. 1963년 서울 서대문구에 가정법원을 신설한 게 대표적이다. 그와 동시에 가사심판법이 제정돼 가사조사관 제도가 도입됐다. 심리학이나 교육학 등을 전공한 외부 전문가들이 재판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같은 해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대법원 사건의 심리 및 조사·연구를 맡는 재판연구원 제도도 도입됐다. 지금은 재판연구관으로 명칭을 바꾼 이 제도는 상고심 보조 인력이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조 전 대법원장은 사법부 발전뿐 아니라 사법부 독립 수호에도 기여했다. 1962년 전우영 육군 대령이 법원행정처장에 임명됐을 때 수차례 사의를 표하면서 군부 정권의 사법부 개입을 막으려 했다. 당시 그는 박정희 대통령까지도 어려워 할 정도로 바른말과 직언을 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만 조 전 대법원장이 사법권 수호에 소극적이었다거나 박정희 정권 아래 사법권 독립의 한계를 느껴 낙후한 사법제도의 근대화에 눈을 돌렸다는 평가도 있다고 사법정책연구원은 설명하고 있다.

일제 치하에서 법관 생활을 하는 동안 창씨개명한 것도 오점으로 꼽힌다. 1940년 조 전 대법원장이 창씨개명한 이름은 조가용부(朝家庸夫)’였다. ‘조선 집안의 못난 놈, 별 볼 일 없는 놈이란 뜻이다. 이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정부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1968년 대법원장 퇴임이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으로 이사해 외부 인사들과의 접촉을 끊고 살면서 언론과의 인터뷰는 물론 기고, 회고록조차 쓰거나 펴내지 않았다. 가족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3남을 두었는데, 아들 조언 · 조윤씨는 변호사로서 부친의 뒤를 이어 법조인이 되었고, 재혼한 부인과 사이에도 11녀가 더 있다. 조 전 대법원장은 1979212일 별세한 뒤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됐다

미단시티 개발로 예단포 마을이 수용되면서 영종문화회를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은 그의 생가터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인천시 등에 요구했고 현재 그의 생가터에 정자를 세워 조진만 전 대법원장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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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단시티 개발로 예단포마을이 수용되면서 흔적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영종문화회 등 지역주민들은 조진만 전 대법원장의 생가터 복원과 기념관 건립을 요구했고, 인천도시공사는 생가터에 정자를 지어 조진만 전 대법원장을 기리고 있다.

 

연구자의 회고

 

조진만 전 대법원장이 살았던 생애는 격변의 시기였다. 그는 이 격변의 시대 가운데 3·1 운동 참가학생, 일제하 조선인 최초의 고등문관시험 합격자이자 부장판사, 8·15 이후 재야법조의 대표변호사, 6·25 당시인권옹호를 강조한 법무부장관, 5·16 이후 사법의 근대화와 사법부의 독립성에 기여한 제3·4대 대법원장 등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왔다.

 

조진만 전 대법원장은 판결서의 한글화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타자기를 사용한 판결서 작성으로 이어졌고, 판결서의 가로쓰기로의 전환은 판결서 양식의 통일과 가독성의 제고를 가져왔다. 아울러 소송절차에서 판결서 작성을 간소화하여 법관들의 업무량을 경감하였고, 증인신문방식을 당사자에 의한 교호신문제로 바꾸었다.

 

또한 법원의 사건 과중에 대처하여 신속한 사건처리를 위해 고등법원 상고부 및 지방법원 항소부를 설치하고, 대법원에 재판연구원제도를 도입하였으며 또한, 전문적이고 효율적인 사법서비스 제공을 위해 서울가정법원을 신설하고, 사법대학원 도입에 기여했다. 이처럼 사법의 근대화는 조진만 전 대법원장의 주요 업적 중의 하나다. 더 나아가 그는 신뢰하는 법원 문화를 만들기 위해 탈권위주의, 공정한 인사를 하였고, 꼿꼿하고 청렴한 법관상을 추구했다.

 

하지만 일제통치기구 법관 생활과 해방 후 5·16군사정변으로 세워진 군사정부에서 대법원장으로서 약 74개월 동안 재임한 사실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한 인간이자, 법조인으로서의 조진만이 남긴 발자취는 완연(宛然)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속에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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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이 낳은 인물 조진만 前대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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