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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11.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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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간 다니엘 기도회에서 많이 불렀던 찬양의 가사가 귀에서 맴돌고, 입에서 흥얼거립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은혜란 내게 찾아온 어떤 것도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어떤 것이 은혜임을 아는 순간, 가슴이 벅차오르고 감사가 밀려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피조물에게 당연할 수 없는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과학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우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극장이라”라고 말한 것 같이, 세상의 존재 그 자체가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대통령과 알고 지내는 것도 대단한 일일진대,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과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는 생명으로 연결된 것이 어찌 당연한 일일까요?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 런던에는 주일이면 이리저리 거리를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답니다. 예배를 볼 자리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시내 곳곳 교회마다 자리가 꽉 차 예배드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한 세대 만에 런던 시내 대부분의 예배당은 텅 비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한 언론인이 영국의 목회자, 신학자, 사회학자들을 인터뷰했습니다. 그중에 아흔이 넘은 신학자가 한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는 순간, 은혜로 주어진 것들을 잃게 됩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은혜를 호의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베푸시는 하늘의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 그동안 베풀어 주신 하늘의 호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도 저것도 하나님의 은혜인데,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면 은혜가 중단될까 염려스럽습니다.


풍성한 가을에 오곡백과라는 결실이 나오기까지 농부의 수고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요? 기름진 땅, 좋은 씨, 햇빛, 비, 적당한 기온 등은 농부가 제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어쩌면 농부의 수고는 작은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지난주 자녀들이 수능을 치렀습니다. 수험생의 수고는 농부와 수고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작은 부분입니다. 그 작은 부분 안에서 실수하고 뜻대로 안 된 것에 대해서 너무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수고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자녀들을 감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추수감사절기입니다. 주시는 모든 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은혜로 받기를 원합니다. 인간관계에도 은혜가 임하면 원수도 불쌍히 보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이해가 됩니다. 조촐한 식사도 하늘의 만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은 감사입니다. 기독교는 사은의 도입니다. 기독교인의 모든 선한 일은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늘의 은혜에 감사하면 은혜 위에 은혜가 강물처럼 임할 것입니다. 다시 마음속에 새기렵니다. 아무것도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늘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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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입니다.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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