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혜정 영종도의 맛기행
영종도 밭은 김장철이 다가오면 또 분주해진다. 배추를 심어 김장을 준비하고 순무를 심어 함께 순무김치도 담근다. 순무 하면 흔히 강화도를 떠올리지만, 영종도 주민도 오래전부터 순무김치를 담가 겨울에 먹었다.
강화도 순무김치는 쌉쌀함과 단맛이 어우러지고 자박한 김치국물이 생기지만, 영종도의 순무는 단단하고 수분이 적어 겨울 내내 두고 먹어도 무르지 않는다. 순무 특유의 알싸한 향과 단단한 무의 식감이 있어, 이러한 차이는 영종도와 강화도의 봄·가을 수확 시기와 토질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순무는 겉이 자줏빛이고 속은 흰색을 띠는 팽이 모양의 뿌리채소로, 껍질을 벗기면 은은한 겨자향이 퍼지고 삼 향 같은 알싸함과 단맛이 있다. 무와 닮았지만 배추과에 가깝고 뿌리·잎·줄기 모두 식재료로 활용한다. 순무는 같은 종자를 다른 지역에 심어도 토질과 기후에 따라 맛이 크게 달라지며, 지역을 벗어나면 순무 알싸한 맛이 사라진다는 특징이 있다.
천 년의 역사, 왕실의 진상품
순무는 삼국시대부터 재배된 오래된 작물이다. 고려 문헌에는 ‘쉿무우’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날의 ‘순무’로 음이 변했다.
중국 삼국시대에도 순무는 중요한 식량 작물이었다. 촉한은 북벌 과정에서 군량 부족에 시달렸고, 제갈량은 장기전 기미가 보이면 즉시 둔전을 설치해 순무를 재배하도록 권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수확이 빨라 군량 확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순무를 ‘제갈채(諸葛菜)’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강화도와 영종도에서 재배한 순무를 왕실에 진상했다. 강화에서 농사를 짓다가 왕위에 오른 철종은 재위 후에도 강화도 순무김치를 즐겨 먹었다. 알싸하고 시원한 맛이 답답한 속을 풀어준다고 전해진다.
의학서도 순무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향약집성방』과 『동의보감』은 ‘순무는 성질이 따뜻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고, 오장을 이롭게 하며 소화와 황달 치료에 좋다’고 기록했다. 또 ‘순무의 씨는 눈을 밝게 하고 몸을 가볍게 한다’고 적어 장기 섭취 시 기력 회복과 장수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순무씨를 볶아 기름을 짜 하루 한 숟가락씩 먹으면 눈빛이 맑아진다는 민간 기록도 있다. 이러한 효능 때문에 순무는 왕의 진상품이자 서민의 보양식으로 자리했고, 흉년에는 식량을 대신할 만큼 중요한 구황식물로 활용되었다.
순무를 겨울철에 김치로 담가 먹는 이유는 순무의 겨울 저장성이 뛰어나 오래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타민 보충과 영양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점도 순무의 큰 장점이다. 순무의 뿌리 윗부분이 자줏빛을 띠는 이유는 항산화 작용을 하는 안토시아닌 색소 때문이다. 여기에 간 해독과 항암 효과가 있는 글루코시놀레이트와 아이소티오시아네이트가 풍부해 순무 특유의 매운맛과 향을 낸다. 또한 식이섬유가 많아 포만감이 오래가고, 뿌리와 잎에는 비타민 A·B1·B2·C, 칼슘, 철분 등 미네랄이 고르게 들어 있어 면역력, 피부 건강, 빈혈·변비 예방에 도움이 된다.
순무는 무처럼 생겼지만 배추과에 속한다. 서양에서는 오래전부터 빵과 함께 먹는 채소로 사용되었고, ‘호밀빵과 순무수프’는 어려운 시절의 대표 음식이었다. 세계대전 중 독일은 먹을 것이 부족해 순무빵, 순무커틀릿, 순무수프로 겨울을 났으며, 이 시기를 ‘순무의 겨울’이라고 부른다.
영종도의 겨울 밥상과 순무김치
밥상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김치다. 영종도의 겨울 밥상에서는 순무김치가 기본 반찬이었다. 채소를 구하기 어려운 겨울을 대비해 김장철에 많은 양의 김치를 담갔고, 그때에 순무김치는 집집마다 빠지지 않고 담가 먹었다. 재료와 손맛에 따라 집집마다 약간씩 다르지만, 영종도만의 순무김치 맛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순무김치는 순무를 2~3cm 크기의 깍두기 형태로 썰고 순무 잎은 일반 무청보다 질겨 겉대를 떼어내고 연한 속대만 골라 양념과 함께 버무린다. 양념은 고춧가루, 마늘, 생강, 파를 기본으로 하고, 영종도에서는 새우젓을 갈지 않고 새우젓과 밴댕이를 통째 넣어 감칠맛을 살린다. 숙성 과정이 진행되면 젓갈 냄새는 사라지고 시원하고 쌉살한 맛보다 달큰한 무의 맛이 올라오며 조화를 이룬다. 발효가 깊어질수록 신맛, 쓴맛, 짠맛, 단맛, 매운맛이 어우러진 순무김치가 된다.
살짝 익은 순무김치는 한입 베어 물면 처음에는 겨자향 같은 알싸함이 먼저 올라오고, 알싸함이 잦아들면 은은한 단맛이 뒤따른다. 새우젓과 밴댕이에서 우러난 감칠맛이 단맛과 어우러지고 식감은 무처럼 아삭하지만 더 단단하고, 오래 씹어도 질기지 않고 무의 수분이 유지되어 오래 보관해도 무르지 않는다. 순무김치를 삼킨 뒤에도 순무의 단맛과 젓갈의 깊은 향이 은은히 향과 알싸한 뒷맛으로 개운하다. 영종도에서는 밥과 함께 먹는 순무김치는 겨울 밥반찬으로 꾸준히 올랐다.
겨울 내내 먹는 순무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숙성도가 달라져 오래 익은 순무는 아린 맛이 사라지고 양념이 스며들어 흰밥이나 된장찌개와 잘 어울리고 겨울 내내 지져 먹으면 새우젓과 밴댕이가 숙성되면서 시원하고 깊은 감칠맛을 낸다. 코끗이 시린 추운날 라면과 함께 먹으면 순무의 시원하고 알싸한 맛이 국물의 느끼함을 잡아주어 훨씬 개운하게 즐길 수 있다.
바닷바람과 영양가 높은 토양이 만든 영종도만의 고유한 순무김치 맛으로, 추운겨울 가족과 둘러앉아 함께 먹던 소박한 밥상의 추억을 다시 떠올려보자.


